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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29일 2022년 화요일 묵상

본문: 레위기 16장 11~22절


1. 레위기 11~15장에 기록된 깨끗한 것과 깨끗하지 못한 것을 구별하는 내용, 깨끗하게 하는 방법 등을 읽어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약 4,500년 전의 기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의학, 위생학 등의 개념이 상식인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놀라운 것입니다.

과거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질병은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를 통해 각 종 질병을 객관적으로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것에서 깨끗하게 되는 방법(세척과 격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통해 말씀하신 살리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방법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죄악)을 불과 물을 이용해 태우시고 씻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가장 분명하고 상세하게 예표하는 성경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상세하게 나타내는 성경입니다.


2.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속죄일’과 관련된 규정은 레위기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아론(대제사장)의 모습을 통해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죄’를 통해 범죄한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 속에는 ‘가려주시는 은혜, 덮으시는 은혜’가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씻음 받았다’라는 개념도 맞지만, ‘죄가 가려졌다’라는 것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를 인간의 개념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3. 오늘 본문 11~13절이 잘 읽어보십시오. 향로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리는 것입니다. 덮는 것입니다. 숨기는 것입니다.

속죄 속에는 크게 두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태워져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죄가 가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가지 의미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내 죄가 옮겨진 제물(대속의 제물)의 죽음과 그것을 불태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의 제사를 드린 사람의 죄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싸워야 할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가려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나를 덮어 주시는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4. 저와 여러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대속의 은혜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죄인인 나에게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깨달음과 노력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선물은 들고 흔들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품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받을 그 어떤 자격도 없는 내게 주어진 선물이기에 영혼에 품고, 묵상할 때마다 굵은 눈물 방울을 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떠올려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장 8~9절)”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선물로 받은 은혜’에 대하여 글과 편지라는 제한된 수단으로 이렇게 기록했지만, 이 속에 담긴 ‘구원의 진리, 가치’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물’ 그 자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를 영혼과 삶으로 곱씹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5.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은 자의 기쁨과 환희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맛보고 고백한 기쁨과 환희는 경박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은 인간이 정해 놓은 ‘가장 좋은 것을 나타내는 그 어떤 단어와 개념’으로도 설명이 안되고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된다!’에 주목해보십시오. 안 되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 하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으나, 오직 십자가 보혈로 가려주시는 은혜를 입고 사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 줄 믿습니다! 이렇게 사는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 보혈, 그 가려주시고 씻어 주시는 은혜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에 진정한 회복과 부흥이 임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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