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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26일 2021년 금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22장 1~13절


1. 오늘 본문의 ‘가룟 유다 스토리’는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내가 선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고 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가룟 유다’를 ‘배신의 대명사’로 낙인 찍을 수만은 없습니다.

유다의 이야기와 유월절 음식 먹는 이야기를 대비하여 보면 이 말씀(기록, 누가복음) 속에 담긴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1~6절을 보면서 ‘가룟 유다’를 악마화 시키는 것입니다. 7~12절을 보면서 뭔가 예수님의 당혹스럽기까지 한 명령에 대한 ‘특별한 순종(?), 신비한 만남(?)’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저와 여러분을 무의식 중에 저주와 축복이라는 무속적 종교관으로 흐르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2. 참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을 ‘운명’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다, 주님의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려면 반드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야 한다.” 등등 갖은 운명론적 해석에 빠져듭니다.

그래야, 나는 어떻게 든 선한 길로 인도함 받는 존재가 되고, 저들은 악한 길로 걸어가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 됩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은 그저 눈물 찔끔 흘리는 ‘후회(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기에 ‘후회’라는 표현을 써봤습니다.)’ 정도에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자기 책임에서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합니다.


3.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 때문이 아닙니다. 3절의 “사탄이 들어가니”라는 표현은 ‘사탄의 악마적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귀신 들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귀신 들림도 갑자기 순간적으로 가만히 있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은 인간이 죽는 그날까지 속임수와 유혹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유혹한 사탄이 ‘가룟 유다’라고 내버려뒀을까요? 제자들이라고 그냥 놔뒀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으나, 여전히 ‘범죄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붙들렸을 뿐 죄의 경향성에 의해 기울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매일 죽을 것처럼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손과 발에서 ‘그 못’을 뺄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기울어진 내 전존재를 십자가에 꽁꽁 붙들어 매야 합니다.


4. ‘가룟 유다’는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따라다녔지만, 결국 자기 기준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교묘히 파고드는 사탄의 유혹에 자기의 자유의지를 반응시켜 ‘예수님을 파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 줄 방도를 말하지 않았어도(4절),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던’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을 것입니다.

네, 5절에 ‘그들 기뻐한 이유’는 좀 더 수월한 방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야 그거 좋다.”입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 당신이 우릴 찾아와 이렇게 좋은 방법을 알려준 걸 보니… 이게 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자기들끼리 ‘자화자찬(自畵自讚, Blow one’s own horn)’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말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이 겉으로는 아주 신앙 좋고, 순종 잘하는 종교인으로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나는 아무 책임 없습니다.”라는 가장 무책임한 말입니다.


5. 다시 본문의 두가지 에피소드를 비교해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7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음식(무교병, 쓴 나물, 어린 양의 고기)’을 함께 나눠 먹은 사람이 있습니다.

10~11절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성내의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대입니다. 명절 음식 준비를 위해 많은 물이 필요했던 시기입니다. 네, 그냥 평범한 사람(하인)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고대근동)에서는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와 요한이 집 주인에게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는 정말 기적, 축복 같은 소식입니다. 그 떠들썩했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에서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네, 예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그 집 주인’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분을 영접한 것입니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없이 그 분을 맞이한 것입니다.


6. 오늘 본문의 두 이야기가 ‘유월절’로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가룟 유다’만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빌라도, 로마군인들, 그리고 또 수많은 무리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후에도 많았습니다. AD. 70년, 유월절을 앞둔 예루살렘을 로마 군대가 둘러 쌌음에도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사건, 그 일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낯설고, 이질적이며 내 본성을 거스르는 선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 여전히 ‘나의 판단, 내 마음의 상태, 내가 살아온 익숙한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극명하게 갈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일들 앞에서 십자가를 통해 열린 생명의 선택을 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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