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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25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21장 29~38절


1.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속량의 은혜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29~30절의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듣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림 언어로 새겨 주십니다.

변하지 않는 자연 법칙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실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한 세대(약 30년)만에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크고 작은 비극은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 수록 그 혼란과 분쟁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2.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33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27~28절이 포함됩니다. 아니, 27~28절이 핵심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실 속량의 완성, 그 대속의 은혜가 완성됨으로 종교라는 이름의 유대교가 폐지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건축물 성전, 종교예식으로써 속죄의 제사, 종교명절인 유월절 등은 사라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친히 성전 되시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공포와 두려움의 시기가 닥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 사랑,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31~33절).

3. 이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 다시는 ‘건축물 성전’에 들락거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십자가 복음’을 종교화, 윤리화, 물질화 하여 자기 가치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비록, 누군가의 눈에 ‘종교적 삶’으로 비춰지더라도 ‘교회생활의 모든 행위’가 자기 의로움이 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그 은혜에 가까이 갈 수록, 십자가의 그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록, 십자가의 그 능력이 내 안에 더 역사할 수록, 더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숨고, 더 입을 닫고, 더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신기하게 그렇게 됩니다. 난 아닌 것 같은데, 돌아보면 한 걸음 더 십자가 앞에 가까이 가 있습니다. 의도한 것이 아닌데, 그저 십자가 앞에 나를 쏟아 놓았을 뿐인데, 성령께서 나를 그렇게 이끌어 가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4. 네, 34절의 ‘스스로 조심하는 삶’을 살고 있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34절의 ‘방탕함과 술취함, 생활의 염려’를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음란, 타락, 음주, 물질의 염려’만이 아닙니다.

절제함이 없는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통제되지 않은 모든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겉으로는 ‘지식, 명예, 존경, 축복, 사랑, 섬김, 봉사, 헌신 등’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좋은 것’으로 보여도 소용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이것을 행하는 자신의 본심을 돌아보지 않은 것들’은 ‘조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5. 사실, 이런 기준에서 제 삶을 돌아보면 말 할 수 없는 ‘고개 숙임’이 있습니다. 찔림이 있습니다. 핑계치 못할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찔림, 고개 숙임, 부끄러움에 변명하지 않으려 또 기도합니다. 제 본성은 자꾸 이유를 대고, 피하려는 약삭빠름이 작동합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가 이런 제 자신을 인정하며 엎드려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이 아프지만, 그것이 사는 길이기에 다시 십자가를 택합니다.

제 인생의 진정한 환란은 제 본성과 그 본성을 유혹하는 사탄의 음성에 속아 넘어갈 때 다가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환란을 피하려는 내 안에 연약함이 환란의 실체입니다.


6. 환란의 실체는 ‘공포스런 상황’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환란을 피하려는 내 안에 연약함, 간사함, 죄성이 환란의 실체입니다. ‘장차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내 안에 숨은 영혼의 상태가 ‘환란’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장차 올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제시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그 그늘 아래 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그런 네 영혼의 상태가 못 박혀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회피, 도망, 변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말끝마다 “주님이 하십니다. 아십니다. 인도하십니다.”라는 수식어를 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한 실존, 범죄한 본성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그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나는 못 박혀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운 것이 생기면, 대안을 찾습니다. 그 대안에 마음을 쏟으며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허망함으로 돌아옵니다. 십자가 앞에서 직시하는 것이 없으면 회피, 핑계, 변명의 쳇바퀴를 돌 뿐입니다.


7. 누가복음 21장 5절의 ‘어떤 사람들의 어리석은 질문’에서 시작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저에게 새로운 영적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종말론에 대한 과몰입으로 오늘 내가 주님과 함께 못 박혀야 할 십자가를 놓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인생이 없습니다.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나의 마지막을 연습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의 마지막’은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참 생명으로 영원을 누리는 새로운 시작으로 다가올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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