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1장 20~28절
1.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의 때(Terminal Age)’를 두려움과 공포로 받아들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죽음’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극한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음’이라는 인간 최후의 운명을 맞이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사람에게 ‘종말, 죽음’ 등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통한 전 우주적 종말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2. 이것은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신념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라는 한 개인의 실존적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좀 묵상하며 기도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부활을 위해 예수님의 생명에 내가 접붙임(Grafting) 되는 수준의 종교적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2장 24절’의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이 영적 질문과 고뇌를 붙들고 기도해보십시오.
3. 누가복음 21장 5절에서 시작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중심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일명, ‘성전신학적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5절의 “어떤 사람”들이 성전 건축물이 화려함, 외형과 껍데기의 어떠함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성전 건축물’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설명이 이어진 뒤 결론이 무엇입니까? 네, 28절입니다.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즉, 요한복음 2장 19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와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헐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다시 일으키시는 것의 영적의미는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제사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더 이상 ‘동물제사, 종교제사 등’이 드려지는 유대교 종교와 성전 건축물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4. 또한 ‘성전’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2장 19절’을 거쳐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3절),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10절)”로 이어져야 합니다. (짧은 지면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2019년 연말과 2020년 연초를 지나며 계속 설명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기 위해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실 구원의 확실성을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속량(redemption)’을 완성했다. 내가 친히 너희의 죄에 대한 값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했다.”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네, 성전에 대한 ‘어떤 사람’에 대한 질문에 ‘내가 친히 속량의 제사를 완성하고 성전 될 것이다.’라는 멋진(?)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일명, 우문현답(愚問賢答, a wise answer to a silly question)입니다.
5. 이단을 비롯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종말에 관한 주장을 할 때, 환란을 피하는 것과 언제 오실 지(시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20~25절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합니다.
특히 24절의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방인의 때”를 계산합니다. 성경의 각종 예언서와 연결시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12장’의 ‘1260일’과 연결하여 ‘이방인의 때가 차는 것’을 계산합니다.
또 나름 건전한 신학을 한다는 쪽에서는 “이방인의 때”를 ‘로마서 11장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와 연결하여 선교와 전도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때”로 번역된 헬라어는 ‘의미 있는 어떤 시간’을 의미하는 ‘kairos’의 복수형 ‘kairoi’입니다. 즉, ‘이방인의 시간들이 찰 때까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네,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한 인간들의 공방전이 계속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목적으로 포장하여 수많은 전쟁이 그곳에서 일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전쟁과 전투가 실제 예루살렘에서 있었습니다.)
6. 따라서 20~25절을 말씀하신 이유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가지 말아라. 내가 십자가에서 속량을 완성했다. 너희가 성지(聖地, The Holly land)라고 부르는 거기에 유월절 지키겠다고 꾸역꾸역 가지 말아라. 연약한 젖먹이, 임산부까지 데리고 그러지 말아라! 제발!”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시작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머리를 들어 십자가를 보라.(28절)”고 말입니다. 28절의 “가까웠느니라”는 헬라어 ‘eggizo’ 동사의 ‘3인칭 직설법 현재 능동’입니다. 즉,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과 동시에 ‘아주 가까이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속량(贖良, Redemption)의 완성은 ‘누가복음’ 독자에겐 이미 이루어졌고, 그 말씀을 듣는 ‘어떤 사람들’에겐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영혼의 고개를 들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거기서 흐르는 생명에 우리 영혼의 마른 목을 적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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