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위기 14장 1~20절
1. 레위기 14장에는 악성 피부병이 나은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제사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환자가 완전히 치유되었고, 그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확실한 선포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정결 예식을 통해 환자 본인과 환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이런 저런 마음들이 해소됩니다. (상세히 설명 드리지 않아도, 환자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짐작되실 겁니다.)
따라서 4~20절에 기록된 내용은 까다로운(?) 하나님이 제시하는 치유를 위한 ‘복잡한 과정’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치유된 사람을 위한 ‘확실한 선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2. 오늘 본문을 글로 읽으면 복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도움을 드린다면, 먼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8절은 환자가 격리된 진영 밖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2~3절은 제사장의 진찰입니다. 4~7절은 새 두 마리를 가지고 행하는 정결 의식입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한 마리에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날려 보냅니다.
8~9절은 치유된 환자를 여전히 진 밖에서 7일을 머물도록 하면서 그가 입었던 옷을 빨고, 몸의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도록 합니다. 당시의 위생개념에서는 엄청난 조치입니다.
두번째, 10~20절은 진영 밖에서 첫번째 정결 규례를 행한 환자가 진영 안으로 들어와 성막(회막)에서 행하는 제사입니다. 이것을 통해 환자는 완전히 일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3. 이런 복잡한 규례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규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병(특히, 전염성이 있는)에 걸려 두려워하는 환자의 마음도 아십니다. 환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아십니다. 전염성이 있는 환자는 두려움으로 대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저주를 섞어서 환자를 비하하는 마음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격리되어 외로움, 두려움, 아픔 가운데 있는 환자를 일대일로 만나 주십니다. 제사장을 통해 그가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먼저 죽은(대신 죽은) 새의 피(5절)’를 ‘살아있는 나머지 새(6절)’에 바릅니다. 그리고 그 새를 들에 놓아줍니다. 날려보냅니다(7절).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모든 죄와 죽음, 수치, 저주에서 해방되었음을 눈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흐르는(5, 6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chay’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즉, ‘생명의 물’에서 새를 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물’이 흐르는 곳에 대신 죽는 새가 있는 것처럼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이 동시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은 예수님에게, 생명은 우리에게 흘러 들어왔습니다.
4. 정말 내가 걸린 병은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죽음과 저주의 질병이라는 것을 아는 환자라면, 그런데 내가 이 죽음과 저주의 대명사인 ‘나병’에서 놓인 바 된 것이 기적보다 더 기적이라는 것을 아는 환자라면 ‘날아가는 새’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저 날아가는 새를 봐라. 이제 너는 완전한 자유!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 어떤 영적 태도를 가졌을까요? 저라면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을 것 같습니다. 눈물이 흐르다 못해 영혼까지 적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풀썩 주저 앉은 낮은 영혼의 태도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여전히 남은 7일에 또 감사했을 것입니다. 남은 모든 인생을 머리털과 눈썹을 밀고 살라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아니, 머리털과 눈썹을 민 사람처럼 영혼의 고개를 숙이고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풀썩 주저 앉다 못해 엎드려 감사, 감격하는 영혼의 자세와 삶의 태도를 떠나지 않은 것이 진정한 축복임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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