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1장 5~19절
1. 본문 5절, 한 절만으로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종교생활에 취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과 사람들의 시선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저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순전히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건축한 것이었습니다.
최고의 건축 자재와 건축 기술로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더라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거기에 드려지는 헌물이 아무리 넘쳐나도 종교적 사치와 허탄한 재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범죄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대속의 제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본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축물에 불과한 ‘헤롯 성전’, 껍데기 종교 시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심으로 친히 성전 되시는 예수님(요한복음 2장 19~21절, 참고) 앞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2. 이것이 인간의 무지함과 착각입니다.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난 절대 그러지 않아.’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합니다.
우리는 그런 적이 없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이해한 적이 없었습니까? 분명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오늘 본문과 계속 이어지는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중에서 8절의 말씀이 마음이 끌렸습니다.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오늘날 자칭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표자들이 떠올랐습니다. (유독 한국에 자칭 재림 예수가 많습니다. 약 50여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시대가 정말 예수님의 재림을 향해가는 말세지말(末世之末, Terminal Age)이 맞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생각이 저를 다시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 자신입니다. 여전히 나의 주인이 내 자아인 사람입니다. 여전히 내가 내 안에서 주인 노릇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3. 지난 1년 여를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것처럼, 지구의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름조차 들먹이기 싫은 ‘그 바이러스’를 자기 편리와 이익에 맞춰서 이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럴 땐 이런 기준, 저럴 땐 저런 기준을 들이댔습니다. 나와 우리에겐 관대하게, 너와 그들에겐 혹독하게 대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종말의 징조라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자기 중심’에서 이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내가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은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의 본성이 도덕생활, 종교생활 따위로 개선될 것이라는 생각을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4. 정말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해보십시오. “주님, 저는 제 자신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내가 그다’라며 내 인생과 내 주변을 장악하려는 것이 저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이런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제발 제가 하는 행동에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십자가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 돌이켜 한 발이라도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저도 이런 기도를 할 때마다 제 자신에게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소망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고, 다시 십자가의 소망 앞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이런 기도만 단순히 반복되는 ‘종교 최면’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역사하심을 믿고, 잘라내고 도려내야 할 것들을 결단해야 합니다.
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를 보면서 ‘막연한 두려움 혹은 터무니 없는 담대함’에 사로잡히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10~19절을 건성으로 읽으며, 15, 18, 19절을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15절의 ‘대적에게 대항하는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가 무엇일까요? 날카로운 논리,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말재주일까요? 아닙니다!
“구변”으로 번역된 헬라어 ‘stoma’는 단순하게는 ‘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증언(testimony)’로 이해하는 것이 더 본문의 문맥에서 맞습니다.
그렇다면 ‘대적이 능히 대항할 수 없는 증언과 지혜’가 무엇입니까? 네,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셨다.”라는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이 지혜와 증언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 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모든 육체와 세상의 껍데기가 벗겨질 ‘마지막 때’가 가까울 수록 내 앞에 십자가를 붙들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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