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0장 41~21:4절
1.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이라는 종교 권력 기관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두 부류의 종교지도자 세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이 주축이 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서기관 포함)’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말로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의로운, 정의로운”이라는 뜻인 ‘사독(Zadok)’은 그들 조상의 이름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사독’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 왕을 도왔고, 그 후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의 대관식을 집례했으며, 첫 성전(솔로몬 성전)에서 봉사한 최초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독 집안, 사독 계열 제사장들’의 권위, 명예, 정통성에 감히 도전할 자들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종교권력 암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내의 최고 권력자는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3. 따라서 ‘사두개인들’에게는 명예와 부(wealth)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로마제국, 헤롯 왕가와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습니다. 때로는 죽일 듯 으르렁거리지만, 동일한 이익 아래에서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두개인들’의 신학 혹은 삶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네, ‘부활’입니다. 죽는 걸로 끝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천국 소망’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땅의 것들만 많이, 더 많이 누리는 것이 다입니다. 물론, 알량한 구원 혹은 천국에 대한 뭔가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보험처럼 말입니다. 죽어서 좋은 곳은 가고 싶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오늘날도 이런 태도의 종교 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넘쳐 납니다. ‘난, 아니다.’라고 생각하지만, 배어 나오는 그들의 삶의 태도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27~38절을 통해 부활을 거부하는 그들의 중심이 결국 ‘상속’ 즉, 돈 때문이라는 것을 그대로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이용해 돈을 쌓는 자들이다. 그래서 가장 귀한 부활의 진리마저 거절하고 있다.”말씀하신 것입니다. (듣고 찔려 돌이켰을까요? 아닐까요?)
4. 어제 말씀이지만, 사두개인들에 대해 설명을 길게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두번째 종교지도자 세력입니다. 바로, 41~47절의 주인공인 ‘서기관’ 즉 바리새인들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종교 윤리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좀 적나라하게 말해서 돈이 되는 종교권력의 중심부에 있지는 않았지만, 상대적 도덕성의 우월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과 명예를 얻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종교지식과 윤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 등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을 지적하실 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39절의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서기관(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시편 110편’을 인용하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의 혈통(다윗 왕족)을 통해 ‘그리스도(메시야)’가 오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네, 현재 유다의 지배자인, ‘헤롯 왕가’와 ‘로마제국’을 도려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권력자인 ‘사두개인들’ 즉 ‘레위 지파’를 축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그 옛날 다윗이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주(Lord)’라고 예언적으로 고백한 ‘그 메시아’가 바로 나다.”라는 것 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서기관들(바리새인들)’에게 내면의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대체, 너희가 다윗의 혈통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사두개인들과 너희는 결국 같은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 결국 문제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며 “선생님, 저들이 들어야 할 말씀을 잘 해주셨네요.”라는 태도입니다. 말씀 앞에 자기의 심령과 내면의 전부를 찢어 놓지 못하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부자의 헌금은 ‘많고, 적음’에 관해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받은 것에 일부를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자칫하면 ‘종교단체 기부활동’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주 많은 것 중에 좀 많이 드림으로 종교 기부행위의 뿌듯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없는 중에 전부를 드렸다며, 또 따른 종교적 헌신의 뿌듯함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4절의 ‘생활비’로 번역된 ‘비오스(bios)’는 ‘생명(life)’입니다. “생명 전부를 넣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의 뜻, 아니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진정한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7. 그렇다면, 어떤 가난한 과부는 누구일까요? 네, ‘생명 전체를 십자가에서 드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유대인’ 아니, 이 말씀을 읽는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종교행위의 의로움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네 생명 대신 내 생명 전부’를 드린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 은혜,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의 영적 태도와 삶의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난 안 믿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 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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