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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1일 2021년 월요일 묵상

본문: 시편 51편 1~19절


1. 시편 51편부터 다시 다윗의 시편이 시작됩니다. 잘 알려진 시편입니다. 이 시편의 표제를 볼 때마다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기록한 다윗도 대단하지만, ‘표제’를 통해 이토록 적나라하게 시편을 기록한 배경을 남겨둔 시편의 편집자들도 대단합니다.

‘시편 51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하 11~12장’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치명적 범죄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힘을 동원해 간음과 살인교사를 저질렀습니다.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시편 51편’은 쉽게(?) 혹은 즉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돌이킴의 결과물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되는 ‘자기 죄성, 본성과의 싸움’을 고백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때로는 죄책감에 시달려 잠 못 이룰 때, 정죄감에 시달려 불안할 때, ‘시편 51편’을 다시 읊조리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시편을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을 기억하며 읽어야 합니다.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라는 생각을 버리고 읽어야 합니다.

2. 죄의 고백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죄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이 회복의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이 시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죄성과 자기 죄에 대한 참담한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해야 합니다. 즉 11절의 고백없이 12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16~17절의 고백처럼 ‘제사’라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표현된 ‘인간 실존에 대한 절대 절망’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갈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사무엘하 12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스라엘의 왕인데, 하나님이 택한 특별한 왕인데”라는 ‘왕의 자존심(?)’ 을 버립니다. “이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이정도도 안 돼?”라는 ‘자신에 대한 호의’에 속지 않았습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은 6절과 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6절의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는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8절의 “즐겁고 기쁜 소리”는 책망의 소리입니다. 질타의 소리입니다. 들으면 아프고 찔리는 소리입니다.

실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교묘히 감추어, 몰래 행한 것’을 비유를 통해 말합니다. 질문을 던져 다윗이 직접 자기가 자기입으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12:5)”라고 대답하게 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꼭 읽어보십시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범죄, 자기에 대한 철저한 절망은 7~19절로 이어졌습니다. 이 고백속에 담긴 ‘정결함, 새롭게 됨, 구원에 대한 간절함’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3. 제 개인적으로 ‘시편 51편’이 더 마음에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16~17절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다윗은 ‘그동안 나는 껍데기 제사를 드렸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진정한 예배는 이것이다.’라고 다윗이 선포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17절)”는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shabar’는 ‘깨어진(broken)’이라는 뜻입니다. 범죄한 인간 실존에 대한 두려움과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손톱 들어갈 틈도 없이 똘똘 뭉쳐져 높아진 심령이 아니라, 산산이 부서진 영혼의 조각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소위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에게 ‘상한 심령’에 대한 애통함과 간절함이 남아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런 심령의 상태가 남아 있다면 도저히 이렇게 살수 없습니다.

찔리고 아픈 말씀이 들려올 때 회피하면 회복과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영적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 누구도 하나님 말씀을 통한 ‘십자가로의 영적초청’을 놓치는 사람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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