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9장 28~48절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이 본문을 익숙한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낯설다는 마음을 가지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38절의 기록을 가만히 그려보십시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유월절 명절’이 이렇게 떠들썩 했던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시대 이후로는 이런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에 있었던 당시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인들(로마제국 각처에서 모여든 유대교 신자들)’이 이렇게 흥분하고, 기뻐하고, 환호성을 지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겠습니까?! (35~36절)
2. 그러나, 우리는 이 환호성 가운데를 지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수십년이 지나서 ‘누가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마음으로 이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주축이었던 ‘유대교 개종 기독교인들’의 마음으로 이 본문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기록을 읽으며 수십년 전 자신들의 행동과 마음의 상태가 기억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깨닫게 해주심을 따라 이 본문을 읽으면 그때, 그 사건(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 오늘 본문의 시작이 있기 전, 누가복음 19장 27절은 이렇게 마무리 했습니다.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므나 비유’는 예수님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왕의 도성이라 불리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개선을 위해 탔던 ‘군마(軍馬,war-horse)’가 아닙니다. ‘나귀(dickey)’를 타셨습니다.
많은 경우 이 부분(30~33절)을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제자들과 나귀 주인)에 초점을 맞춥니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딱 거기까지 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왕들은 전쟁에 출전하지 않을 때는 주로 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심판자 혹은 정복자’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38절의 기록처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4.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평화(화평)’의 대상과 방법입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입니다. 방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도차이가 발생합니다. 간극이 발생합니다. 질문이 필요합니다. 37절의 수많은 무리들이 외쳤던 내용(38절)을 다시 잃어보십시오.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하늘의 평화, 높은 곳의 영광’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려는 ‘평화, 영광’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네, 그건 아닙니다. 가야바의 법정과 빌라도의 재판장, 십자가 아래에서 침묵 혹은 고성을 질러 댄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 아닙니다.
5. 그런데 왜 예수님은 39절의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면서 40절의 대답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 일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 나름대로 외쳐도 긍휼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 그것이라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의 신앙고백(눅9, 막 8, 마16)을 받아 주신 그때의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곧바로 엉뚱한 소리를 할 줄 알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두번째는(첫번째와 연결됩니다.) ‘그때 그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때 자신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아, 내가 그때 몰랐었다. 그때는 평화, 영광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외쳤다. 그렇게 환호하던 나는 빌라도의 법정 앞에 나약하게 서신 예수님을 비난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는 저주까지 했다.”라는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6. 그렇게 이어지는 45절 이하의 기록을 보십시오.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장사하는(poleo)”은 우리가 의미하는 일반적인 상거래가 아닙니다.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 가져온 짐승을 검사한 뒤 흠이 있는 것을 일정한 금액을 보상한 뒤 ‘흠 없는 것’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엄청난 부당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분노의 채찍질이 아닙니다. “이젠 이런 것 그만두어도 된다. 내가 십자가에서 흠 없는 어린 양으로 드려져, 대속의 은혜를 완성할 것이다.”라는 안타까움과 긍휼의 마음이 섞여 담겨있는 것입니다.
7. 성령의 감동을 통해 성경을 바라보면 생명, 사는 길이 보입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나를 움직이는 종교생활(무속생활)을 떠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이끄는 ‘참 믿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좀 길어지는 것 같지만, 41~44절을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이 당할 저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당할 운명 혹은 형벌을 예언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가 ‘유월절’ 직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만약, 그 유대인들이 40여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거기(예루살렘)에 있었겠습니까? 네, 예루살렘이 아니라, 내 심령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있었을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내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죄악을 대신해서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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