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9장 11~27절
1. 본문의 ‘므나(Mna)’라는 단위는 화폐의 단위이기도 하지만, ‘금, 은, 보석 등’의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이기도 합니다. ‘한 므나’의 가치는 대략 노동자의 100일 치 임금의 가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므나 비유’와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차이가 있습니다. ‘므나 비유’는 주인이 떠나면서 같은 양의 ‘므나’ 즉, ‘한 므나’를 주었고, ‘달란트 비유’에서는 각각 다른 양의 ‘달란트 (다섯, 둘,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므나 비유, 달란트 비유’를 보면서 ‘주신 무언 가를 가지고, 남겨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받은 것의 많고 적음, 남긴 것의 많고 적음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 열매 맺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 요즘은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를 좀 더 깊이 해석하고 바라봅니다. 다른 양을 받은 ‘달란트 비유’는 말 그대로 각자에게 다르게 주어진 ‘달란트, 은사, 재능 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양을 받은 ‘므나 비유’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신 ‘영적 가치, 영적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참 좋은 해석의 방향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의 경향의 결과도 또 ‘남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20절의 남기지 못한 자, ‘수건에 싸 둔 자’를 책망하시고, 심지어 그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는다’라고 말합니다.
3.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 즉, 예수님이 ‘남기지 않음’ 때문에 그렇게 혹독한 태도를 보이신 것일까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것입니다.
22절에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또 한 사람(20절)”으로 지칭된 ‘종’의 행동과 말이 다릅니다.
종의 행동이 무엇입니까?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말은 무엇입니까? 네, 21절입니다.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합니다.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예수님)은 열명의 종을 불러 ‘한 므나’ 씩 나눠 주었습니다(13절).
왕위를 받아 돌아온 귀인(예수님)은 “그들”을 불렀습니다. 열명 모두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16~20절을 보시면 세 명의 이야기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일곱 명은 어디 갔을까요?
더 정확한 질문은 나머지 일곱명은 앞의 두 사람(첫째, 둘째)에 해당될까요? 아니면, 므나를 빼앗긴 “또 한사람”에게 해당될까요?
다시 말하면, 므나로 장사를 잘해서 이윤을 남김으로 고을을 차지했을까요? 아니면, 수건에 싸 두어서 므나를 빼앗겼을까요?
4. 저는 그 일곱 명 중에는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놓았으나 빼앗기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 비천한 제가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다 표현하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성령 하나님을 통해 조금이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앞에서 말씀드린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22절)”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온 귀인(예수님)은 그의 행위 즉, 므나를 많이 남기고 말고 때문에 그를 심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 때문입니다. 심령의 고백, 믿음의 고백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 함이라…”(21절)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평가, 오해, 착각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착각하고, 평가하는 이유는 ‘죄인에 대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무한한 긍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해 인간이 추구하는 땅의 가치, 육신의 가치를 이루려는 목적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과 그 종교지도자들은 율법 속에 있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가치’를 발로 찼습니다.
축복과 저주라는 결과물을 가지고 인간의 질투심과 두려움을 자극하여 종교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내가 저들의 왕이 되어야 하는데,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저들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네, 14절과 27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는 이 말이 너무 슬펐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 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러는 것은 아닐까…라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6.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들도 가장 먼저는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자기 품에 품었을 것입니다. 그 ‘므나’가 귀했기에 더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아름답게 ‘장사’했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지옥을 가지 않기 위해, 대가와 상급을 받기 위해 노예처럼 예수님을 믿으려 합니다.
‘여리고의 맹인, 삭개오’ 같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안으로 부르시는 그 음성을 영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가치를 영혼에 새기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칼과 창을 든 두렵고 무서운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두 팔 벌리신 사랑의 왕이십니다.
두려움에 쫓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녹아 예수님에게 스며 드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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