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위기 10장 12~20절
1.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론, 엘르아살, 이다말’이 왜 그랬을까? 또 화를 냈던 ‘모세’는 무엇을 좋게 여겼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19절의 아론의 대답에 대해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라고 기록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9장으로 거슬러가야 합니다. 9장은 앞에 제시된 제사의 규례에 따라 ‘첫 제사’가 시작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처음으로 ‘아론(대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위해 ‘송아지’를 드렸습니다. 번제(burnt offering, 모든 것을 다 태우는 제사)로 ‘숫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위해 ‘숫염소’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위해서 ‘어린 양’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놓고 생각해봤을 때, 16절의 기록처럼 모세가 찾았던 ‘속죄제’를 드린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드린 ‘속죄제’였습니다.
‘속죄제’는 지정된 부위를 먹어야 했습니다. 12~15절의 기록처럼 ‘염소’도 그렇게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먹지 않고, 다 태워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송아지’보다 ‘염소’가 맛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런 식의 생각은 딱 사람 생각입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자면, 사람의 입맛에 따라 ‘염소’를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염소’가 건강에 더 좋다고 합니다.)
2. 제사장이 속죄제를 비롯한 제사에 드려진 고기들을 먹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린 사람의 죄를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 대한 신격화가 아닙니다. 제사장이라는 존재(그저 한 낯 사람이고, 죄인이지만…)를 통해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이 수반된 안수를 통해 죄인의 죄는 짐승에게 옮겨집니다. 즉, 동물의 사체(고기)는 죄로 더럽혀진 상태입니다.
이 부분이 제 마음을 참 무겁게 했습니다. 정상적인 제사장,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제사장이라면 그 고기가 마냥 맛있고, 그 고기가 주는 포만감이 즐거울 리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드린 사람의 죄가 심각하면 죄의 무게에 대한 오염이 심하다고 여겨져 그 죄를 말살하기 위해 예외적인 규례로 ‘속죄 제물’을 완전히 태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속죄제’의 고기를 먹는 것은 단순한 ‘수고의 대가’가 아닙니다. 잠깐 입은 즐거울 수 있으나,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든 영혼의 무게와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아론’과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두 아들과 형제가 죽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두 아들(나답, 아비후)이 고의로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한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서도 성경은 구체적인 답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론’의 아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어쩌면 평생 “하나님, 왜 그러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을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19절은 반항(?)이 아닙니다. “저 까다로운 하나님, 차라리 아무것도 안 먹겠다.”라는 식의 태도가 아닙니다.
나를 포함한 온 이스라엘과 인간 존재 자체의 죄악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 마저도 자아실현의 도구로 삼는 인간’의 죄악이 너무 깊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선물과 양식이 아닌, 바친 자의 죄! 제사장은 그것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지금 아론은 두 아들들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9절)
두 아들의 잘못에 대한 마음의 무거움과 슬픔을 품은 아론… 그는 나를 포함한 모든 백성의 죄가 옮겨진 속죄제의 고기를 삼킨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규례대로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가 하나님의 법을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구원, 그 구원에 대한 나의 즐거움(?)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넘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인 나! 아무 죄 없는 나! 하지만, 내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지 않으면 ‘악함으로도 다 표현이 안 되는 인간의 존재의 죄악’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모든 당연한 것들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묵상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당연하지만, 삼키지 않는 것을 택함을 통해 진정한 영혼의 풍성함과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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