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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16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8장 31~43절


1. 오늘 읽으신 본문은 두가지 에피소드입니다. 31~34절은 누가복음 9장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더 가까워진 만큼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35~43절은 여리고 근처에서 만난 맹인을 치유하시는 기록입니다. 이 말씀은 내일 살펴보실 ‘삭개오’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맹인과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자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버려진 자들입니다.


2. 하지만, 문제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난 택함 받았다.’라는 자기 확신, 더 나아가 자기 최면과 환상에 빠져서 ‘내가 잃어버린 자다’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위가 높고, 인정받고, 가진 것이 있을 수록 그랬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종교적 혈통적 신분과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받은 높은 지위와 명성, 부유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위의 높음,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본문의 ‘부자 관리’처럼 자기도 모르게 땅의 것들에 전인격과 영혼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빠진 ‘종교적 최면과 환상’, 그리고 진정한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그렇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사람이 어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나는 나의 종교적 신념을 붙들고 있는가?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있는가?”를 있는지 질문할 뿐입니다. 이 글을 쓰고 또 지우는 제 자신에게 이런 영적 갈등이 있는지 질문할 뿐입니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 고난’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니, ‘십자가 고난을 통한 대속의 은혜 완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저, 예수님이라는 신적 존재가 행하는 기적에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저 사람이 내게 줄 수 있는 ‘떡과 물고기, 병 낫게 함,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 등에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맹인’입니다. 그냥 맹인이 아닙니다. ‘구걸하는’ 맹인입니다.

‘구걸하는’이라는 헬라어 ‘prosaiteo’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구걸’입니다. ‘싹싹 빌며, 애절하고 간절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영혼까지 끌어서 좀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그가 구하는 것이 예전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한푼 줍쇼.’가 아니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심’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로 번역된 헬라어 ‘eleeo’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그 존재가 아니면 절망에 처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겨있습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요청이 아닙니다. “네가 안 도와주면 운이 없을 뿐,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된다.”가 아닙니다.

즉, 맹인은 진짜 구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 아니면, 이 절망에서 나를 건져줄 분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구했던 ‘eleeo’는 거짓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이 절망에서 나를 건질 수 없습니다.”라고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까지 끌어올려 구걸하고 있습니다.


5. 오늘 본문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이후에 기록된 것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것(34절)과 구걸보다 더 간절한 구걸을 하며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주심(eleeo)를 구하는 맹인의 이야기를 왜 연결해서 기록했을까요?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자 누가를 통해 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실까요?

네, 이유는 하나입니다. “너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구걸하고 있느냐? 너의 죄성을 직시하며 유일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 나의 불쌍히 여김(eleeo)을 구걸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불쌍히 여김’에 대한 ‘구걸’이 더 잘 나타나는 본문은 ‘마가복음 10장 35~52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좌우편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드려 지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6. 사람에게 ‘구걸, 불쌍히 여김’ 등은 그리 달가운 단어가 아닐 것입니다. 구걸하고 싶고, 불쌍히 여김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들 떵떵거리고 살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혀를 차며 한 푼 쥐어 주는 위치, 적선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 누구도 ‘구걸하듯 아쉬운 소리하는 삶, 누군가 나를 안 됐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서 ‘구걸, 불쌍히 여김’이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구걸하는 맹인이 부러울 지경입니다.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높아질 대로 높아진 우리의 심령이 불쌍히 여김을 구걸하는 맹인의 마음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구원이 있는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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