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8장 15~30절
1. 누가복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누가복음 13장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여정’은 계속됩니다.
사순절 기간을 지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그 발걸음, 십자가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에 다시 새겨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궁극의 목적은 범죄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안에 다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7장 20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 오늘 읽으신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지(17절)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16절)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딘가에 있는 유토피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천국 입성’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이루어집니다. 내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아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왕으로 있었던 자아는 죽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3.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린 아이’의 이런저런 특징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예수님의 비유와 연결했습니다. 각종 아동심리학, 교육학 등에서 말하는 어린아이의 성향을 들먹였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종하고, 순수하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르며,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즉,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라면 두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저와 여러분, 예수님을 정말 순수하게 영접하셨습니까? 우리 진정으로 예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난, 그렇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100 아니면, 0입니다. 어줍지않은 조금의 순종 혹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번째 문제입니다. 정말 어린 아이들이 순수합니까? 순종을 잘합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영특과 교활사이를 왔다갔다하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봐 넘겨줄 뿐입니다.
4. 그렇다면, 대체 ‘어린 아이’는 누구입니까? 그 해답은 16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러 가까이 오게 한 어린 아이”입니다. 네, 범죄한 모든 인간을 십자가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십자가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어린 아이’입니다.
만약, “순종 잘하는 어린 아이처럼 순종해야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간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행위구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네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던 죄인(민철)아! 이제 나의 십자가 앞으로 오너라.”라는 그 부르심에 이끌려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 나아온 사람’이 ‘어린 아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십자가 앞으로 나온 이방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5. 그렇다면 ‘부자’에 대한 것도 달라져야 합니다.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도 부자가 되면 안 됩니다. 교회에 부유한 사람이 있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책망하시고, 꾸짖으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너무 안타까우셨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유함, 풍족함’에 기대어 있는 그의 중심과 영혼을 안타깝게 보신 것입니다.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은 ‘하나님,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더 나가 그가 그토록 지킨 율법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기대려 합니까? 하나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도 그것에 기대면 안 됩니다. 기대는지 아닌지는 그것을 가짐으로 드러나는 내 삶의 태도, 반대로 그것을 가지지 못함으로 드러나는 내 삶의 자세가 증명합니다.
참 어려운 줄 압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얼마나 사람의 태도를 좌우하는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더 붙듭니다. 더 기댑니다. 예수님만이 내 힘이고, 나의 의지할 반석이심을 고백하고, 기도합니다.
6. 마지막으로 28~3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뚱딴지 같은 질문,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 특히,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왜냐면, 누가복음이 기록될 즈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여러 배’는커녕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심지어 순교를 당했습니다.
자아를 실현한 뒤 자아에 기대어 살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내 자아를 버린 십자가에 기대어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의 이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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