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62편 1~12절
1. ‘시편 62편’은 시편 1, 23편과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시편입니다. 시편 몇 편이라는 숫자보다, ‘오직 주 만이’라는 찬양의 가사로 더 친숙합니다.
표제인 ‘여두둔의 법칙’은 ‘여두둔을 따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여두둔’은 ‘아삽, 헤만’과 함께 다윗 시대의 레위인 음악가(작사가) 중 한 명입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 헤아릴 수 없는 곤경과 어려움이 있지만, 이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실 분은 진정한 요새와 반석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시편 62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면서 원수들의 공격에 대해 고발합니다. 5~8절은 다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같은 표현(1,2절과 5,6절은 대칭입니다.)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을 것을 권면합니다. 9~12절은 처음 두 부분과 거리가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합니다.
9~10절은 다윗이 경험한 현실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나와 당신의 영원한 구원, 반석, 요새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합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 물론, 다윗은 자신이 인생에서 경험한 허망한 상황, 안타까운 상황의 원인을 외적 요인에만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왕이 되어야만 하는 나를 공격하는 어떤 세력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왕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끌어내리려는 악한 세력을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이 이 시편을 기록한 목적이 아닙니다.
4절의 “그들”은 분명 ‘사울 혹은 압살롬 등’과 같은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이 맞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그”는 ‘왕위에 있는 다윗, 의로운(?) 다윗’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다윗’과 그를 대적한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 없는 삶, 그렇게 자기 탐욕과 권력 등을 위해 ‘다윗’을 모함하고 공격하는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속이는 삶입니다.
‘다윗의 대적들(그들)’은 대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같은 ‘유다지파 사람들(시54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압살롬)이었습니다.
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입으로는 각종 종교적인 언어를 내뱉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그럴 듯하게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와는 아주 거리가 먼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4절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사울, 압살롬 등이 그토록 왕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왕의 자리’는 내가 결정하고, 행하고, 누리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이라는 명분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이었기 때문입니다.
4. 다윗은 누구보다 이런 사람의 간사함과 악함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입술로는‘여호와를 의지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통해 얻은 왕의 자리가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 자신도 그런 유혹에 노출되어 넘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10절의 “포악”은 단순히 ‘폭력을 동반한 어떤 힘’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과 힘을 어떤 대상에게 강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탈취한 것”은 단순히 ‘강압적, 폭력적 수단 혹은 속임수, 불법 등으로 빼앗은 재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의 욕심에 기반하여 얻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아픈 이야기이지만, 다시 생각해봅니다. 다윗이 포악으로 탈취한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거기다가 다윗의 재물, 다윗이 왕이 됨으로 이스라엘에 늘어난 재물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솔로몬 성전’을 짓기 위한 모든 비용과 재료는 다윗이 준비한 것(역대상 22장)이었습니다.
5. 어쩌면, 이 시편은 아름다운 멜로디가 어울리는 ‘수려한 서정시’가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삼키며 노래한 ‘탄식시’일지 모릅니다.
다윗은 분명,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권력, 명예, 부 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아, 이것은 허망한 것이구나. 참 덧없는 것이구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허망한 것이라고 깨달아도 좋으니, 그만큼 누려보고 깨달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입니다. 허망한 것들을 향한 사람의 미련이 이렇게 강합니다. 아무리 9~10절 같은 말씀을 봐도 자꾸만 땅의 것에 마음이 갑니다.
그래서 소망은 12절에 있습니다. “행한 대로 갚으심”은 행위구원이 아닙니다. ‘갚는다’라는 표현은 ‘되 갚아줌’ 또는 ‘복수(?)’가 아닙니다. 여기서 ‘행함’은 ‘주의 인자함’에 붙들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나의 죄성을 인정하며, 지금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나를 인자와 긍휼로 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반석, 요새임을 다시 선포하고 고백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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