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위기 7장 11~27절
1. 오늘 본문은 레위기 3장에 기록된 ‘화목제’에 대한 추가 내용입니다. 무교병, 구운 과자 등이 추가되고, 일부는 제사장들의 몫이 됩니다(11~14절).
추가된 내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화목제물을 드린 사람도 남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상세 규례가 15~21절입니다.
그러나,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22~27절). ‘기름과 피’입니다. 건강과 관련된 것과 동시에 영적의미(죄와 죽음)가 담겨 있습니다.
내일 읽으실 본문(너무 매일 정해진 진도에 얽매이지 마십시오.)인 28~34절에는 다시 화목제와 관련된 제사장의 몫에 대해 기록합니다.
2. 계속 말씀드리지만, ‘레위기’를 읽을 때 종교 행위를 위한 방법론(?)으로 읽으시면 낭패를 봅니다. 지루해서 못 읽습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해가 되어도 그런 종교 의식을 치를 수도 없고, 행할 이유도 없습니다.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28~34절에 기록된 ‘요제(搖祭wave offering)’와 ‘거제(擧祭heave offering)’는 완전한 제물이 되어 십자가 못박혀 들린 바 되신 예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 그 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원한 소득’ 즉,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되신다는 의미가 ‘화목제’ 속에 담겨 있습니다.
3.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화목제’를 드린 후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고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기복신앙(祈福信仰),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니 어쩌니 말 할 여유가 없습니다. 제 자신도 삐끗하는 순간 그 방향으로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것들을 금기로 여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한 두 걸음을 위한 필요, 일용할 양식을 향한 간절함과 감사함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소망으로 걸어간 삶의 결과가 드러나야 합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결과가 엉뚱한 것이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4.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수많은 것들, 광야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해진 그들 곳간을 그려봅니다. 은혜입니다. 축복입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토록 풍족히 드리고 싶었던 ‘소제(grain offering)’도 마음껏 드릴 수 있었습니다. 죄 용서를 위한 의무제(속죄제, 속건제) 외에 자원하는 제사이자, 축제 같은 제사인 ‘화목제’를 더 많이 더 풍족히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치명적 한계가 발목을 잡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익숙함과 편안함에 젖어들 때 드러나는 치명적 한계가 발목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화목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는커녕 ‘종교 행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고기 먹기 전에 ‘가장 먼저 행하는 번제(burnt offering)’의 의미, 3장에 기록된 영적 의미(죄 씻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는 형식적으로 얼른 지냅니다. 그리고, 모두의 관심과 시선은 ‘이후 먹을 고기’를 향합니다. ‘이미 아는 고기 맛’을 상상하며 목구멍으로 꿀꺽 침을 삼켰을 것입니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화목제’는 드리고 싶어도 쉽게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곡식을 구하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거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3장까지의 규례만 지켰고, 곡식과 관련된 규례들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 드렸다고 말합니다.
마침내 규례대로 온전히 그리고 풍성히 드린 ‘화목제의 제사! ‘무교병, 구운 과자, 유교병’과 함께 드리는 풍성한 ‘화목제사’는 말할 수 없는 풍요, 기쁨, 감사, 감격 등 ‘좋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개념과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과 드리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가 정말 “자기 소득”이라고 착각했을 때, 앞에 태우고 쏟은 ‘기름과 피’의 의미를 망각했을 때 “영원한 소득”이신 하나님을 던져버리게 됩니다. 말은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결국 고기가 목적이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묵상을 할 때, 제 마음은 천박한 가벼움과 진중한 무거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더 정확히는 무거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또 본성 반대로 인도함 받습니다. 자아가 아닌,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은혜에 이끌립니다. ‘자기 소득’이 아닌 ‘영원한 소득’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오늘 됐다고, 내일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제 실패했다고, 오늘 안 될 것이라는 절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결국 사라질 ‘자기 소득’이 아닌, “영원한 소득”이신 예수님! 나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들리시고, 나 대신 먼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 그 분을 다시 만날 것에 참 소망을 두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