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1장 47~57절
1. 오늘 본문에는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대하는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읽어 보면 섬뜩합니다. 기록한 것이 이정도면 기록하지 않은 것은 상상 이상일 것입니다.
종교가 이권화, 권력화 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이런 문제를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알지만, 자신들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문제입니다. 남은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49절을 통해 그 당시 종교권력의 정점이었던 대제사장이 ‘가야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야바’라는 인물을 비난하라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물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등장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인이라고 비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인물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너도 그럴 수 있다.’라는 우려 섞인 경고(?)입니다. ‘난 절대 그러지 않는다’라는 자기 우월감에 빠진 사람에 대한 안타까운 권면입니다.
지금까지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볼 때 ‘누구누구처럼 쓰임 받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오늘 본문의 ‘가야바’같은 인물을 볼 때, “오늘도 십자가에서 자아를 죽이지 못하면 제가 ‘가야바’입니다.”라는 기도와 고백이 먼저 나오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것도 오늘까지입니다. 내일 그렇지 않으면 저는 얼마든지 ‘가야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가야바’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삶, 그 분의 말씀, 그 분이 행한 표적을 듣고 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냥 전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직접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지 않았습니다. 들은 것을 자신의 경험, 생각, 이권 등등 인간의 한계 속에서 이해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표적’은 그냥 ‘놀라운 초자연적 현상’입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수단일 뿐입니다. 47절의 ‘표적(sign)’이라고 기록한 것은 ‘표적’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을 위한 표현입니다. 그들이 ‘표적’으로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야바’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48절 밖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빼앗길 이익과 당할 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 밖에 없습니다.
47~48절의 분위기(?)를 상상해보십시오. 성경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종교 생활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인 최고 종교회의(산헤드린 공의회, Sanhedrin Council)에서 오간 대화입니다. 그들이 벌인 난상토론을 압축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3. 이 모든 소란을 진정(?)시킨 사람이 ‘가야바’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인 50절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이것은 무서운 계략입니다.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죽이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교묘하게 말을 툭 던지는 것입니다. 마치 갱(gang) 영화에 나오는 두목들이 제거 대상을 지목할 때 쓰는 수법과 같습니다.
말을 던져 놓고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보는 것입니다. 미끼를 던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미끼를 무는 이유는 각자의 탐욕과 이익,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사탄이 이렇게 합니다. 선악과를 먹게 하는 사탄의 계략(창세기 3장)을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누리는 이익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니다. 그렇게 자아가 죽은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는 삶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참 많이 속는 것이 ‘도전’이라는 말입니다. “도전 받았습니다.”라는 표현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걸 풀어 말하면 “당신이 받은 축복이라는 이름의 어떤 것을 나도 받고 싶습니다. 더 종교생활 열심히 해서 더 많이 받고 싶습니다.”라는 속내가 뒤섞여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떨까요?)
4. 인간은 참 어리석습니다. 자기가 내뱉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가야바’는 간사하고, 교묘한 말을 ‘백성과 민족을 위한다.’는 포장지로 감싸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차도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고 51절에서 기록합니다. 그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말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51~52절).
이런 것이 진짜 무섭습니다. 입으로는 맞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이 어떤지 모르는 이런 상황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축복도 누리고, 잘 되고, 칭찬 듣고, 종교생활도 하기 때문에 내 속사람이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진짜 두려운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자, 두려움의 고백인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을 더 붙들게 됩니다.
종교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매일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말입니다. ‘상을 받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내가 받을 유일한 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내 삶이 ‘의(義)의 무기(로마서 장 10~14절)’로 드려 지길 간절히 기도하며, 그렇게 살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