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2장 13~34절
1. 오늘 본문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잘 알지만, 경우에 따라서 밀쳐 두기도 합니다. 심지어, 좀 껄끄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가진 사람은 13~21절이 부담일 수 있습니다. 현재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22~34절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아멘, 할렐루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귀합니다. 힘이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 아쉬움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빈 공간’이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수록 영혼의 시선을 십자가에 묶어 두고 말씀을 바라봐야 합니다. 은근 슬쩍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덮어놓고 ‘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었다.’라고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한 순간이라도 말씀의 인도함, 성령의 비춰 주심, 십자가에 붙들림 없으면 보이는 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제 자신입니다.”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곱씹어야 합니다.
2. 본문 13절에 소리치는 ‘무리 중에 한 사람’은 정말 딱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유산 분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문제, 생명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하면 더 가질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하겠다는 일이 ‘형을 명하여 유산 분배 받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말씀을 들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들으면서 구약의 기준을 깨는 놀라운 말씀이라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네, 구약의 관습대로 ‘장자에게 모든 유산을 상속하는 법’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이거다! 예수님이라면, 저 훌륭한 말씀과 권위로 형에게 명한다면 형의 유산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거야.”라는 혼자만의 깨달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성하실 대속의 은혜를 통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상속’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무리 중 한 사람’은 ‘땅의 상속 문제, 유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3. 예수님은 15~21절을 통해 ‘무리 중 한 사람’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책망이 아닙니다. 그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15~21절을 다시 새겨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그 누구도 ‘난 아니다. 난 탐심 없다. 난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말씀은 ‘무리 중 한 사람, 소리친 그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무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5절에 분명 “그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닙니다.
탐심의 해결은 도를 닦고, 걸인처럼 살아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못한 영혼의 구멍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탐심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못한 깊은 영혼의 결핍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자꾸만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새로운 것, 감각적인 것 등등에 마음이 빼앗길 때 잠시만이라도 십자가 앞으로 나가 엎드려야 합니다. 이것을 원하는 내 본심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주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이런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입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은 그냥 읊어대는 종교 레퍼토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은 위선을 위한 너스레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4.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보면서 22절의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가 마음에 찔렸습니다. 22~33절을 보면서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먹이신다.’라는 예전의 생각에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가 ‘또 나에게 이르시되’로 보였습니다. “너도 여전히 ‘유산문제 때문에 소리치던 그 사람’의 마음으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냐?”라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부르심이 들렸습니다.
저에게 ‘유산 문제’는 여러분의 그것보다 더 교묘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목회 성공이라는 종교적 가치가 포함됩니다. 십자가 복음이 아닌 사람이 종교업적으로 만든 그 허상이 저를 따라다닙니다.
우리 소유를 팔아 배낭을 만듭시다.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하늘의 유산을 받기 위해 배낭을 만듭시다. (33절) 그 배낭은 ‘예수님’입니다.
‘다함이 없는 보물’은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헌신, 봉사, 섬김, 나눔, 구제 등’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함이 없는 보물’이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가장 기쁘고, 가치 있는 일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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