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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5일 2021년 금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1장 27~36절


1. 오늘 읽으신 본문은 세가지 에피소드 입니다. 27~28절은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칭송하는 장면입니다. 29~32절은 여전히 초자연적 기적을 통한 어떤 표적(sign)을 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기적과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3~36절은 ‘등불 비유’입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 에피소드의 마지막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전개에서 27~28절에 기록된 한 여인의 반응은 이해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록자 ‘누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이것을 기록한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초자연적 능력과 기이한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의 반응을 그만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지겨울 정도의 ‘신격화, 우상화’ 본능이 있습니다. 27절에 기록된 ‘여인’의 반응은 예수님을 낳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칭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인들의 평가는 자녀의 업적이나 능력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이런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을 보며 그 당시의 세계관, 그녀를 지배하는 가치관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칭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28절은 이런 여인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죄인에게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십자가 은혜’를 붙드는 것이 참 복이라는 뜻입니다.


2. 그렇게 바로 연결되는 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29절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는 말씀은 2,000년 전의 세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 모든 세대를 향해 하시는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기적은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한 과정이 뿐이었는데, 여전히 초자연적 현상과 그 결과에 영혼의 시선을 빼앗긴 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이 29~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종 이 본문을 ‘요나의 표적’을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난 요나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시는 말씀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 예수님의 부활조차 어떤 신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기적’,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람이 생각하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이런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종교 상징물 혹은 부적 수준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요나의 표적’의 핵심은 32절입니다.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대체 뭘 듣고, 뭘 바라고,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 니느웨 사람들도 요나의 메시지,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다. 심지어 남방여왕도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왔다. 그런데 너희는 ‘회개’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기적’에만 관심이 있구나.”입니다.

누가복음 전체, 아니 복음서 전체, 성경 전체에서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힘입어 일어나는 ‘기적, 축복, 상황의 변화’ 다 좋습니다. 그런 것을 부정하고, 거절할 생각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일들’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베풀어 주심으로 우리가 바라는 이 땅의 것들이 이루어지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짜 관심은 32절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이킨 삶의 흔적이 있는지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많은 기적과 축복을 경험했더라도 정말 그것이 받을 자격 하나 없는 내게 베풀어진 것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십자가 앞에 엎드린 삶, 전인격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네, 좀 불편할 수 있습니다. 받은 것, 이룬 것으로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본능이 올라오지만, 결국 또 십자가에서 돌이키는 생명의 삶, 빛의 삶, 등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바로 이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회개를 강조하신 뒤에 등불을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등경 위에 등불을 두어 사람들이 빛을 보게 하시겠다(33절)’는 말씀은 ‘높은 자리, 지위’ 따위에 우리를 올려서 우러러봄(?)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십자가 그 높은 곳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자아가 죽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십자가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말 그대로 복음적인 해석입니다.

34절의 “눈”은 신체 기관의 눈이 아닙니다. 영혼의 상태를 말합니다. 네 영혼의 상태가 십자가 은혜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너의 전인격과 삶은 여전히 어둠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35절은 우리 안에 계신 빛이신 예수님이 어둡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을 가리고 있는, 어둡게 하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말합니다.

26절은 매일 매일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 영혼의 어두운 부분들이 남아 있지 않도록,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도록’ 밝게 비추라는 의미입니다. 성화(Sanctification)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가장 높아진 마음, 가장 깊이 감춰둔 그 본성이 예수님의 빛에 드러나 사라지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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