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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4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1장 14~26절


1.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영향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낫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바알세불’이라는 더 큰 귀신의 힘으로 내쫓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5절)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라고 요구합니다. (16절)

예수님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자기 생각과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죄에 기울어진 인간 본성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15절의 ‘바알세불’은 크게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명사로 ‘악한 영들의 통치자’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흐름에서 ‘사탄’ 혹은 ‘귀신들의 우두머리(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고유명사로 ‘바알세붑’이라는 아람의 신을 말하기도 한다는 견해, ‘파리들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바알 뮈이온’을 의미한다는 견해, 가나안 지방의 대표 우상인 ‘바알’과 성전이나 처소의 뜻을 가진 ‘제불’의 합성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15절에서 사람들이 ‘바알세불’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폄하한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무속에서 말하는 신내림을 받은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저, 인간 본성의 가치 구현을 위해 신적 존재의 초월적 능력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바라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16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더, 더, 더’를 외치고 있습니다. 더 신비한 것을 원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는 뭔가 더 드라마틱하고, 신비적이며,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해보라는 말입니다. 즉, 내가 만족하고, 내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런 기적을 행해보라는 것입니다.

2. 이것이 기적에 눈이 먼 사람들의 결국입니다. 보이는 현상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종교적 카타르시스에 취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영적인 것’이라는 포장으로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자기 욕망과 욕구를 채우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악한? 마음, 여전히 기적에 마음과 시선이 빼앗긴 사람들의 중심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그렇게 17~20절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역으로 이용하여 반박하십니다. 한마디로 “같은 편인 귀신과 귀신이 싸운다면 ‘사탄의 나라’가 온전하겠느냐?”라는 말입니다. 21~22절은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저 사람을 장악한 처음 귀신을 쫓아냈다면, 지금 저 사람은 더 지독한 귀신인 바알세불에게 장악 당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일침을 날리신 것입니다.

즉, “지금 저 사람의 상태를 봐라. 저 사람에게 ‘사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치유함을 받은 것이다.(20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잠깐 여담이지만, 14절에서 말 못하던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이렇게 묻는 것이 맞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처음 따라하도록 가르치신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2~4절의 ‘주기도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 따라해 보아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 천천히 한 마디 씩…”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셨을 거라 믿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의 특성(?)을 24~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더 강한 귀신에 의해 귀신이 나갔을 때 결국은 다시 귀신이 돌아옵니다. 무속인들이 말하는 신 내림(강신:降神) 혹은 접신(接神) 등이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으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26절 이후에 이 기록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간 그 자리에 내가 그의 주인, 생명의 주인으로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다.”라는 말이 담겨있습니다. 이걸 꼭 기록하지 않아도, 말로 하지 않아도 성령의 비추심으로 ‘누가복음’을 읽는 사람이라면 영혼의 눈으로 발견하고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 성령님은 귀신과 같은 더러운 영이 아닙니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으스대고, 뻐기고, 나대고, 교묘한 영이 아닙니다. 선한 영(Spirit), 회복의 영, 생명의 영, 구원의 영입니다. 사람의 말, 표현으로 형용할 수 없는 정결하고, 깨끗하며, 겸손하고, 아름답고, 순결한 영이십니다.

무엇보다, 귀신이 떠난 자리를 비워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으로 좌정하십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 생명의 길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도록 도우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붙잡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비록 나는 이런 모습이지만,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치유, 회복, 정결하게 하심으로 나를 이끄시고, 내 안에 주인으로 좌정하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며 선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사람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종교 생활하는 안타까운 삶을 버리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미 내 안에 빛과 능력, 생명, 선함으로 계셔서 나를 통해 일하고 계심을 믿고 나를 주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주술적 종교행위로 귀신은 나가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된 발음으로 외치고, 침을 튀기며, 손을 갖다 댄다고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오염된 물과 같은 내 영혼에 예수님의 정결한 생수, 그 십자가 보혈이 계속 흘러 들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공급될 때, 어느 순간 내 안에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 생명’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내 전인격이 삶을 통해 주변으로 흘러 들게 됩니다. 26절 이후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로 채워라!”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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