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1장 1~13절
1. 오늘 본문 2~4절은 ‘주기도문’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5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짧지만, 필요한 내용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마태복음의 강조점과 조금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5~18절의 문맥에서는 ‘주기도문’이 ‘이렇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즉, 주기도문 자체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은 ‘주기도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에 대해 말합니다. 바로 13절의 ‘성령’입니다.
2. 많은 기독교인들이 5~13절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 응답해 주신다.’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받는 것을 기도라는 종교행위를 열심히 행한 결과물로 이해합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식의 종교적 이해는 타종교와 무속, 심지어 속담에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가 한국 속담에 버젓이 있습니다. 한 때,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라는 말도 성행했습니다.
오늘 본문(성경, 하나님 말씀)이 말하는 ‘그 간청함을 인하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좋은 것을 주신다.’라는 것이 타종교의 그것과 같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있을까요? 혹시,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그 어떤 신적 존재보다 강한 분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선교사들이 전한 종교라서 믿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빈민국에서 온 사람이 전한 예수님이라면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많이 믿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청함으로 구하라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가치관에서 말하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땅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누리려는 것들을 간청하고, 떼를 써서라도 얻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을 두드리고, 끈질기게 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찾으면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는 것은 죄악된 인간 본성이 원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3. 예수님께서 간청해서라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누가복음이 사도행전과 동일 저자(누가), 동일 수신자(데오빌로 각하)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데오빌로를 비롯한 모든 독자들이 기도를 통해 간구해야 할 것이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실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니까, 데오빌로가 정말 제대로 누가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을 읽었다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강림 사건을 보면서 “맞다. 첫번째 편지(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 기도로 구할 것이 ‘성령’이라고! 간청함으로, 두드리고, 구하고, 찾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이었지! 그래, 내가 기도로 간구할 것은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이다!”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혹은 성령의 임재를 ‘신의 능력(?)’이 자신에게 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좀 극단적인 표현을 빌자면 무속인들의 ‘그 분이 오셨다.’ 혹은 ‘강신(降神)’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그렇게 신비적인 현상이 자신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성령 받겠다고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면 결국 ‘각종 은사’라는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된 신비한 능력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령, 성령의 능력의 본질은 ‘정결함’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나를 통해 드러나도록 완전히 나를, 내 죄성과 본성을 불태우는 것이 진정한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도록 통로(파이프)에 불과한 나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참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온전치 못합니다. 온전치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 죄의 오염에 다시 철퍼덕 넘어집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의 오염에서 겨우 건짐 받은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남아서 덕지덕지 붙은 찌꺼기를 성령의 불로 태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 넘어가는 어떤 신비적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성령의 임재는 유기적이고 연속적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사람은 끝날까지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 이끄심으로 예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내 심령과 영혼을 나무 쪼개 듯 쪼개어 성령의 불에 던질 때 활활 타오르는 성령의 능력을 붙드십시오! 그 능력이 상황과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견디고, 이기며 살아가게 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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