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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2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0장 17~24절


1. 본문 25~37절에 기록된 내용은 너무 잘 알려진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타이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이야기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잘 알려져 있으면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라는 법률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법안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있습니다. 법 적용의 대상에 있어서도 국가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국가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방치한 경우에 처벌하는 법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이 예기치 않게 부상 혹은 사망, 물질적 피해 등을 입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손해배상등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법에 이 이름을 붙여 사용합니다.

그만큼 비기독교인에게도 오늘 본문이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삶의 열매와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 본문이 기독윤리의 최고봉일까요? 분명 맞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이라면 맞습니다.


2.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으며 남들보다 우월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본문을 정말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29절의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율법교사’는 이미 스스로 자신은 영생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선한 행위, 이웃을 돕는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몰라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교묘히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은 수사학적 기교일 뿐입니다. 그는 이런 것에 능숙했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선행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선행의 대상, 방법, 시기 등을 자기 중심적으로 정합니다. 인간 본성 깊은 곳에 숨은 자기 의로움에 근거하여 착한 행실의 범위를 정합니다. (물론, 이정도도 하지 않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즉, 이 ‘율법교사’가 지금까지 선행을 베푼 대상은 자기 의로움으로 정한 사람들(이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0~36절의 예화를 통해 “네가 절대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의로울 수 없는 사마리아인이 너보다 더 의롭다. 바로, 이 사람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면 네가 생각하는 너의 의로움은 가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본문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의 요점, 주제가 무엇입니까? 25절에서 율법 교사가 무엇을 물었습니까? 네, ‘영생(永生Eternal-life)’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구원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만약, 이 본문이 ‘선한 일, 착한 일’이라는 도덕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행위구원’, 선을 많이 베풀면 베풀 수록 구원이 확실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죽을 힘을 다해 구원을 위해 선행을 축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인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이 완성하신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영생’에 대하여 인간의 어떤 공로나 의로움이 더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맞기에 오늘 본문은 기독윤리적 해석에서 그칠 수 없습니다. 아니, 기독윤리를 강조하는 말이 아닙니다. 선행을 해야 영생,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국 ‘이웃이 누구냐?’의 문제에 대답해야 합니다. 본문 속에서 진짜 ‘이웃’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은 제대로 말씀하셨는데, 율법교사와 우리가 오답을 찾은 것입니다.


4. 정답을 얻으려면 이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셨는지를 봐야 합니다. 힌트는 모든 장면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연약한 사람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네, ‘어떤 사람,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네가 진짜 사랑해야 할 이웃, 영접해야 할 이웃은 ‘어떤, 강도만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어떤 강도만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사장, 레위인, 유대인, 자기 의로움에 가득 찬 사람들,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이방인, 낮고 비천한 자들, 자신의 죄 때문 울던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38절 이하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위한다며 봉사, 헌신, 섬김 등을 많이 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내 속에 모시기 위해 ‘그 발 앞에, 그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이용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 본문이 ‘죄인인 내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서 ‘좋은 일, 착한 일, 선행’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를 도구로 예수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에 아무 말 안 하게 되고, 선한 일이 나를 통해 드러날수록 더 예수님을 가까이하며, 그 분과 깊은 교제 가운데로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이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어떤 강도만난 사람 이야기’로 바뀔 때 진정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이 우리 삶에 넘쳐나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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