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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26일 2021년 금요일 묵상

본문: 시편 48편 1~14절


1. 시편 48편의 표제는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입니다. 1~2절은 복음송 가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율동이 기억나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노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쉬르(shir)’입니다.

‘이런 단어까지 주목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이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자칫 오해하기 쉬운 성경 속의 참 뜻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시편 48편’의 핵심은 9절이하에 있습니다. 특히 9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1절의 선포, ‘여호와의 위대함,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이 지극히 높음’의 이유는 9절 때문입니다. ‘주의 전(여호와의 성전)’을 통해 베풀어 주시는 ‘주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함은 가장 힘 센, 최고의 신이라는 인간 언어와 이해의 한계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을 드림으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은혜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대하다’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2. 위에서 말씀 드린 ‘쉬르(shir)’라는 단어가 ‘표제’에 사용된 유일한 시편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 30편’입니다. ‘시편 30편의 표제’는 이렇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입니다. 바로, 여기서 ‘가(歌, song)’으로 번역한 단어가 ‘쉬르(shir)’입니다.

신학자들은 ‘시편 30편’과 함께 ‘시편 48편’을 ‘성전 낙성가(Song for Dedication of the Temple)’에 포함시킵니다. ‘시편 30편’이 미래적인 관점으로 성전을 사모하며 기록한 것이라면, ‘시편 48편’은 지어진 성전에 대한 사모함과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30편’을 기록한 ‘다윗’과 ‘시편 48편’을 기록한 ‘고라 자손’이 성전을 사모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두 시편을 함께 읽어 보십시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차단된 하나님의 은혜, 주의 인자하심이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온 땅에 흘러 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편 48편 11~13절을 보면서 ‘성전 건축물’ 혹은 단순한 ‘종교적 우월감’으로 성전의 어떠함을 판단하여 ‘후대에 전하라’는 메시지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외적인 요소로 평가되는 모든 것은 십자가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 ‘축복, 영광 등’ 그 어떤 종교적 단어로 포장해도 소용없습니다.)


3. 이 시대는 기독교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애써 둘러 표현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내 주변에서 예수님을 믿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 서면 고개가 숙여집니다.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매우 뻔뻔한 사람…)

그래서 다들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새로운 시대상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제시하는 대안들을 보면 훌륭합니다. 맞는 말을 합니다. 그런 실천과 대안 제시를 위한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습니다. 한 구석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미지 회복, 영광 되찾기, 시대상 제시 등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의 전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성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요? 주의 인자하심을 왜 구해야 하는지 범죄한 자기 실존에 대한 철저한 인정없이 ‘이상한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만 남은 것은 아닐까요?”

시편 30편에 나타난 성전을 향한 다윗의 사모함 없이 시편 48편을 이해한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싶다면(14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놓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붙든 사람의 전인격과 삶의 태도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30편’을 거친 ‘시편 48편’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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