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7편 1~9절
1. 시편 47편의 큰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심과 동시에 온 땅을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다’입니다.
47편은 46편처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46, 47편은 ‘승전 기념식’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전쟁과 관련된 사건 혹은 행사’에서 불렀던 것은 아닙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드리는 제사와 예배에서도 불렀을 것으로 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언제 불렀느냐가 아닙니다. 시편 47편을 찬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지금 이 시편을 읽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왜 읽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할까요? (너무 뻔한 질문 같지만,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편 혹은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아무런 감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위대한 하나님은 왜 나에게는 역사하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두번째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의욕이 지나쳐서 ‘신앙 자존심’을 강화하는데 이런 본문을 이용합니다.
2. 어떤 마음의 상태가 더 위험할까요? 어떤 마음의 상태를 조심해야 할까요? 당연히 두번째입니다. 첫번째는 말 그대로 ‘초자연적 혹은 간증거리로 말할 수 있는 사건과 체험’을 경험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물론, 이런 식의 변화를 장려(?)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두번째의 경우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인 사람일수록 ‘신앙 자존심’이 자극하는 데 ‘시편 47편’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2절의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를 단순하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가장 능력이 많고, 힘이 센 신적 존재를 두려워하는 공포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3절의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기 하시며”라는 표현을 보면서 이상한 종교적 우월감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4절의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를 읽으면서 영적 착각에 빠지면 안 됩니다.
3. 시간이 지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신 진짜 이유를 잊었습니다. 우상숭배에 허덕이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이유,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속에 담긴 대속의 은혜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역시 여느 인간과 똑같이 범죄한 죄성, 육체라는 지독한 한계, 세월이라는 고약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음을 간과했습니다. 그렇게 익숙함의 함정, 우쭐댐의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인 ‘대속의 은혜’를 착각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라 불리는 초자연적 현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런 집착은 고대근동의 약소국의 하나였던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자격지심(?)을 덮으려는 수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하게 될 뿐입니다.
4. 오늘 말씀은 이해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몰라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하거나, 잘못된 적용이 문제일 뿐입니다.
시편 47편을 우리의 심령에 가만히 읊조려보십시오.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디에 이루어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심령입니다.
세상의 교만한 왕들과 비교되지 않게 높아진 우리의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뒤집어쓰고 자아의 고개를 끝까지 들고 있는 내 교만한 심령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나팔이 우리의 심령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담대함이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감춰지고, 포장된 내 어두운 심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이 말씀의 방향이 외부를 향하기 전에 내 심령을 향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높아진 마음, 나도 모르게 숨겨놓은 중심이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가 임재하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