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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24일 2022년 목요일 묵상



1.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 ‘표제(아삽의 ,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편을 노래(낭송)할 때는 ‘아삽’같은 지휘자(?)가 먼저 낭송하면 따라 노래했습니다.

이때 오늘날 같은 음악은 형태는 아니지만, 시를 낭송하는 운율이 있었습니다. 시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두둔의 법칙’은 ‘여두둔’이 만든 운율의 법칙 혹은 곡조였을 것으로 말합니다(역대상 16장 41~43절 참고).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아삽’은 작사가, ‘여두둔’은 작곡자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이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참 있는 그대로 자기 마음을 고백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자기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구나…’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1절).

자기 입술로, 자신의 진실한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시는 성령님의 비추심을 의지하여 직접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도 압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의 이유와 목적은 그가 직접 하나님 앞에 냉정히 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가 진실되게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3. 그렇게 이 모든 문제, 상황, 사건의 중심에 결국 내가 있다는 것을 아프지만, 고통스럽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2~9절의 기록이 저 정도면, 내면의 상태는 더 아팠을 것입니다. 괴로움과 후회를 쏟아냅니다(3~5절).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심을 의심하기도 합니다(6~9절).

하지만, 이내 돌이킵니다. 10절에서 “이는 나의 잘못이라”는 고백! 인간의 본성으로는 너무 하기 힘들지만, 해야 사는 고백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모두가 고백하고, 모두가 들었습니다. 군중 사이에서 묻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입술로 고백한 것을 정확히 듣고 계십니다(1절).

(찬양을 드릴 때, 노래로 드리는 사람과 영혼의 고백으로 드리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내 입술로 드리는 가사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찬양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래 부르는 것입니다.)


4. 하나님에게 죄가 무엇일까요? 인류 보편 가치 또는 인간 윤리에서 말하는 것들도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는 숨기는 것입니다. 이런 내 모습을 감추기 위한 자아의 몸부림입니다. 인간이 판단한 가장 고상하고 좋은 것으로 자신의 본성(하나님을 싫어 버린 본성)을 감추려는 모든 영혼의 태도가 죄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이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사랑, 자기 의로움에 바탕을 둔 징징대는 기도에서 헤매게 됩니다.

10절의 “이는 나의 잘못이라”는 고백은 어느 종교에서 말하는 ‘내 탓이오’가 아닙니다. 이런 것이 구호화 되면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 보다 나은 사람’ 이라고 여깁니다(물론, 티는 안 냅니다.). 반대로 ‘그래 다 내 탓이지. 다 내 잘못이야’라는 식의 ‘자기 비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자기 비하’조차 겸손(?)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5. 따라서 다시 영혼의 시선은 하나님으로 옮겨 갑니다. 이런 나를 건지신 하나님! 이런 나에겐 소망이 없지만, 이런 우리를 값을 주고 구원하신 하나님! 속량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15절)!에게 소망을 두고 찬양을 드립니다. (14~20절)

11절의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은 어마어마한 초자연적 기적! ‘홍해’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 장애물’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적 존재의 능력’으로 갈라진 것으로만 이해하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라는 자연 장애물을 넘어서는 현상을 통해 당신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속량(贖良, redemption), 대신 값을 지불함으로 자유와 생명을 회복시키심”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물(16절)”은 ‘죽음’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가르심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로 맞이하는 ‘죽음’을 이기시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의 방향은 ‘이런 나의 모습, 지금 상황의 어떠함’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에 잠시 안타까워할 수 있으나, 이내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내 음성으로 상하고 아픈 마음을 쏟아 놓는 것에 머물지 않고 모든 저주와 죄악에서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홍해 물’을 가르시고, ‘생명의 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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