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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21일 2022년 화요일 묵상

본문: 시편 75편 1~10절


1. 시편 75편은 ‘아삽’이 기록한 시편입니다. 레위 지파였던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함께 다윗 시대에 성전에서 예배와 관련된 음악과 시를 담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역대상 25장). ‘아삽’은 총 12편의 시편(50편, 73~83편)을 기록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찬양대 지휘자 혹은 작사가, 작곡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의 직분, 재능, 지파 등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 그를 감동하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특별한 달란트를 받아서 선택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린 똑같은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주일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예배 인도자, 설교자, 목회자 등등’ 사람이 만들어 갖다 수식어(?)가 그 사람의 어떠함,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를 붙드신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이 그 사람의 존재를 말해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고린도전서 15장 10절)”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 또한 ‘나를 위대한(?) 사도(使徒, Apostle)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나, 도무지 이렇게 될 수 없는 나를 살리신 십자가 은혜!’ 앞에 굴복한 영혼의 고백입니다.


2. ‘아삽’이 기록한 시편은 흔히 생각하는 ‘주신 재능으로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 탁월한(?) 솜씨로 기록한 멋진 작품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라는 지극히 종교적 수식어로 포장하여 자기를 뽐내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시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의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에 주목해보십시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머리에서 언뜻 떠오르는 생각 혹은 들어서 아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의 정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표현에서 “주의 이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대상을 부르는 방법’, 말 그대로 ‘이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가까움’이 ‘하나님의 임재’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능력이 대단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까이 있으니까, 좀 더 종교행위를 열심히 해보자.”는 식의 의미로 다가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뭔가 아득한 곳, 저 하늘 어딘가에 계시는 하나님을 불러오기 위한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사람의 종교적 노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신적 존재가 감동하여 강림한다는 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은 이미 택하신 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들(자녀들)을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명기 12장 5절).

이것은 단순히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찾아오심’을 말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은 예배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먼저 그곳에서 임재하여 계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고,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순간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함을 구하게 됩니다. 그 분의 인도함이 내 생각과 달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삽’은 예배를 드릴수록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뛰어난 재능으로 하나님을 감동했기 때문에, 나에게 예배 잘 드릴만한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로 흔히 말하는 ‘은혜 받았다’라는 영적 느낌(?)이 참 허무하다는 것도 됐을 것입니다.

결국, 예배는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선택, 은혜 가운데 드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록 영적인 냉철함이 더하여 갔을 것입니다.


4. 저와 여러분, 주의 이름이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믿으십니까? 십자가의 피로 내 안에 새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계십니까? 그 이름이 정말 저와 여러분의 능력이며, 삶의 이유입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런 믿음을 붙들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저는 ‘오만한 자(4절)’입니다. ‘교만한 자(5절)’입니다.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그 분의 이름을 오르내리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임재를 통한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 좀 절뚝거릴 수 있습니다. 좀 지칠 수 있습니다. 좀 우왕좌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들릴 때, 다시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잠깐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 나를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다스림 받고, 이끌림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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