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7장 11~19절
1.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9장 51절에서 시작된 예루살렘으로 항하는 예수님의 여정이 본격화 됩니다. 예루살렘 여정의 후반부의 시작이며, 본격적인 십자가 고난을 향한 여정입니다. 누가는 여기서부터 이동 경로와 지역을 자주 밝힙니다.
11~13절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를 지나십니다. 그리고 한 마을로 가십니다. 거기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납니다. 열명의 나병환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곳은 나병 및 부정(unclean)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변두리, 빈민가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본 그들은 멀리 떨어져 예수님을 향해 소리칩니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합니다.
이 나병환자 열명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긍휼과 자비’를 구한 것일까요? 적어도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나병환자 열명에게 예수님이 구원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자의 역할은 자기 육체의 병을 낫게 해줄 신적 능력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13절에 “선생님”으로 번역된 헬라어 ‘epistaes’는 ‘최고의 장인’을 의미하는 ‘Master’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사령관(commander), 우두머리(chief)’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네, ‘랍비’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는 그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에게 명하십니다. 이전에는 비로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뭔가 다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가는 도중에 나병이 나았습니다. 일명 ‘믿음과 순종’으로 생각하면 이 나병환자들만큼 대단한 믿음과 순종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몸이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에게 보이러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그 믿음과 순종의 결과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의 간절한 바람과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 존재와 그 신이 가진 능력을 믿고, 종교적 요구를 충족하는 순종을 행합니다.’ 이렇게 하면 기적이라고 불리는 결과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있고,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epistaes’로 생각하고 긍휼을 구해도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입니다.
15~19절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딱 한 사람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만이 19절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참 구원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19절의 ‘믿음’과 14절에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14절은 그냥 ‘병 낫는 것(이 땅의 변화)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19절의 ‘믿음’은 ‘돌아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이키는 믿음입니다.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리는 믿음입니다.
병 나음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병 나은 것이 과정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뒤 우리 삶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축복받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인생에 나타나는 ‘길흉화복의 어떠함’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십자가 구원의 증거’로 삼는 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3.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봐야 합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아홉 영혼, 제 갈 길로 가버린 아홉 명을 찾고 계십니다. (17~18절)
특히 18절에 “이방인”이라 번역된 ‘allogenes’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여기만 사용됐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allogenes’라는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allogenes’는 일명 ‘금기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 자체를 더럽게 여겼습니다. 이 단어는 성전에 경고문에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방인(allogenes)도 성전 주변의 구획과 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잡히는 자마다 정죄를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문에 말입니다.
그럼, 이 속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이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해도 ‘나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이방인(allogenes)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9대 1입니다. 열명 중 한 명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병환자들처럼 눈에 띄는 신적능력을 힘입은 결과물이 있는 사람들일 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돌아와 엎드린 단 한 명의 나병환자가 들려준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게다가 그의 신분은 ‘사마리아인(이방인보다 더 이방인 취급 받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은 것은 저주가 담긴 ‘이방인(allogenes)가 아니라, “이방인(allogenes)인 너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왔구나”라는 축복, 자비, 긍휼, 은혜의 음성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끝까지 엎드려, 주님 만나는 그날에 ‘돌아온 사마리아인 나병환자’가 들은 그 음성 듣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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