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9장 13~23절
1.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선천적)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의 기록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본문을 통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초월적 능력)을 힘입어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땅의 삶에서 기적이라 불리는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기적에 무관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웬만큼 있을 것이 있는 경우, 아쉬울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경우는 기적 같은 어떤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위의 두가지 태도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표적, sign)을 통해 가리키는 참 진리를 놓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9장’을 전체로 묵상하십시오. ‘맹인이 눈을 뜬 것’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그 사건 이후의 대화’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적어도 ’요한복음 10장’까지 연결하여 묵상하십시오.)
2. 오늘 본문의 기록도 대화입니다.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화입니다. ‘눈을 뜬 그 사람’을 데려다 놓고 이것저것 묻습니다(17절).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16절).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 와서 취조하듯 추궁합니다(18절 이하).
‘바리새인들’은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왜 이렇게까지 끈질길 정도로 논쟁하고, 추궁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기 위해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죽여야 합니다. 그냥 죽일 수는 없습니다. 율법, 알량한 율법을 지키기 위해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14~16절의 문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눈을 뜬 사람’의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안식일을 범한 죄인입니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3.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선지자니이다.(17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포기 할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눈 뜬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 옵니다(18절 이하).
부모의 태도와 대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혜롭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맞습니다. 지혜롭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도 ‘율법’을 이용하여 빠져나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장성하였으니…(21, 23절)”라는 말로 빠져나갑니다. ‘내 자식은 율법이 말하는 성인(成人, adult)이니 나는 책임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22절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출교(黜敎, Put out of synagogue)”는 모든 것에서 버림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은 완벽한 따돌림과 고립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 나면서부터 못 보던 자녀가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진실조차 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알면서도 말 못하고, 기쁘면서도 표현할 수 없는 상황(현실)을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4.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의 무서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이라는 종교 규례를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거나 감추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간사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율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폐기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율법의 참 의미를 모르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제사장, 서기관)’같은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자신들이 그럭저럭 지키는 율법을 가지고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행하고, 지키는 일부의 율법을 가지고,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빌미로 죽이려 했는데 오죽하겠습니까.
두번째는 ‘눈을 뜬 사람의 부모’같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속의 두려움을 율법(“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으로 감추는 사람입니다. 율법이 정한 ‘출교’가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자기 속의 모든 본심(눈을 뜬 것에 대한 기쁨, 출교에 대한 두려움 등)을 율법을 핑계로 감춥니다.
5. 저와 여러분은 어느 부류의 사람일까요? 아마 때에 따라 두가지가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내가 유리할 때는 종교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내가 불리할 때는 종교 행위로 나를 숨기고, 가립니다.
아마도 제가 이런 교묘한 종교적 이중성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일 겁니다. 왜냐면, 사람들에게 ‘성경을 많이 알 것 같다. 신앙이 좋을 것 같다. 왠지 하나님과 좀 친할(?) 것 같다. 기도를 많이 할 것 같다.’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숨이 나옵니다. 제 속에 종교심 때문에 한 숨이 나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겸손한 척 다른 사람들의 신앙심(?)을 평가하려 드는 제가 한심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묵상하며, ‘사도 요한’의(성령 하나님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나를 보게 하신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실로암 연못, 안식일 준수 등’ 엉뚱한 것에 마음 빼앗긴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내가 보이면 다행이지만, 남이 보이면 실패입니다. (내가 보이는 것조차 ‘성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저 은혜 안에서 ‘다행’일 뿐입니다.)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어쭙잖은 인간의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전체를 묵상하는 가운데 그들처럼 엉뚱한 소리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다행이고 감사인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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