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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19일 2021년 금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6장 1~13절


1. 오늘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대부분의 이해는 ‘주인에 대한 충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10절)’으로 연결합니다. 그리고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13절)’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생각합니다.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맞는 충성스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을 얻기 위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하고 적용하면 잃는 것이 많습니다. 이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많이 놓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5~7절은 분명히 주인을 속이는 것인데, 8절에서는 왜 그를 칭찬 하실까?”라는 질문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10절 이하를 읽으며 고개를 영혼의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가 있습니다. 합니다. 그래도 됩니다. 그런 질문 때문에 성령의 비춰주심을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유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가지의 중요한 영적 주제를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저런 다양한 비유를 들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15장에서 시작된 비유와 계속 연결됩니다. 즉,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자를 찾음’과 연결됩니다.

이 비유들은 반복되면서 점점 깊어집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를 지나, ‘두 아들(동생과 형)의 비유’를 기점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 즉 ‘구원의 방법’이 강조됩니다.

바로, ‘탕감(forgiveness, write off)’입니다. 채무자(빚진 자)의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채권자의 ‘전적인 의지’와 ‘베풀어줌의 은혜’를 통한 ‘탕감’이 핵심입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 5~9절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죄 용서(탕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부자(하나님)의 본심은 빚진 자에 대한 탕감’입니다.

따라서 ‘어떤 부자’가 ‘청지기’에게 맡긴 사명은 ‘빚 탕감을 채무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청지기가 ‘어떤 부자’의 마음을 짓밟은 것입니다.

‘청지기’가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평가된 이유를 단순히 ‘주인의 물질을 횡령한 것(1절)’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청지기’는 아주 교묘하게 횡령했습니다.

빚진 자들을 향한 어떤 부자의 긍휼한 마음을 전하지 않음으로 채무자들이 과도한 이자와 이에 따른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살도록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네,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구약성경’ 속에도 ‘범죄한 나 대신 제물이 드려지는 것을 통한 죄사함, 대속의 은혜’가 있습니다. 민족적 혈통과 종교적 정통성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대속의 은혜 안에 있는 언약’으로 구원받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은 ‘대신 속죄’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종교화 했습니다. 유대인은 민족적 혈통까지 가미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권력화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3절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종교인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제 자신도 이 말씀을 직시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8절 때문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저 자기 살기 위해 행한 ‘청지기’의 일을 칭찬하셨습니다(8절). 이유는 딱 하나! ‘빚진 자들이 탕감 받은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너그럽게 보십니다.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에게도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9절에서 “불의의 재물”은 청지기가 교묘하게 가로 챈 ‘물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베푼 대속의 은혜’를 종교화해서 독점하고, 가로챈 죄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9절 속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은 “구약 속에 담긴 대속의 은혜를 선포하지 않은 죄를 회개해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한 나, 예수를 영접해라(친구로 사귀라). 이제는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죄를 탕감하시는 은혜와 생명을 선포해라.”입니다.

혹시 우리도 ‘십자가 복음’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에 가둬 놓은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의 은혜’ 무속적 개념으로 이해한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의 능력’을 이 땅의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반복되는 질문이 아니라, 매일 계속되야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 1절을 깊이 묵상하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인의 소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다시 부르시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낭비’로 번역된 ‘diaskorpizo’는 ‘흩어버리다’입니다. (이 단어는 ‘디아스포라: Diasora’와 같은 어근입니다.)

네, ‘청지기’의 진짜 죄악은 ‘죄에 대한 탕감을 선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을 흩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탕감의 은혜’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전인격과 인생이 ‘십자가 은혜’에 붙들린 삶, 그 낮은 영혼 태도가 삶을 흘러나와 전파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우리 교회 포함)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은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흩어버린(낭비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두려움이 저와 여러분의 남은 신앙의 삶에 배어 나와 참 청지기의 삶을 감당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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