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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18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5장 11~32절


1.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깊이 녹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장 많이 오해했습니다. 둘째 아들, 일명 ‘탕자’를 중심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와 그를 사랑으로 맞이해준 아버지를 중심으로 읽었습니다. 큰 아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사랑이 부족한 조금 못난 아들 정도로 슬쩍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전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신다. 우리는 큰 아들의 마음을 버리고, 그들을 넓은 마음으로 품어야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제 비유에 이어 그저 전도에 잘 어울리는 본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최근에는 첫째 아들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둘째 아들을 품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2. ‘두 아들 중 누가 더 낫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비유가 진행되는 순간에 ‘잃어버린 아들’은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를 하기 전까지는 ‘둘째가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돌아왔습니다. 비유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돌아온 사람은 ‘둘째 아들’이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첫째 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2절의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입니다. ‘각각’은 형과 동생 모두에게 나눠주었다는 뜻입니다. 즉, 각자가 받아야 할 몫을 둘 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반반이 아닙니다.

당시 문화에서 장남은 다른 아들들이 받을 유산의 두 배를 상속받았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형에게 더 많은 것을 이미 주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받은 형이 동생의 탕진을 보며 속상해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결국, 형은 방탕하게 살지 못한 자신이 억울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럴 줄 알았으면, 나도 내 맘대로 살 걸 그랬나?”라는 억울함(?)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자기 본성을 숨기며 꾸역꾸역 살아온 세월이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29~30절에 기록된 아들의 심리 상태는 동생의 도덕성(?)을 질타한 것 같지만, 결국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억울했던 것입니다.

3.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네, 유대인들의 마음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입니다. 꾸역꾸역 참고 구원과 축복을 받기 위해 그토록 종교생활을 오래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 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신 하나님에게 너무 속상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생활이 너무 너무 억울했던 것입니다.

어제 읽으신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비유(3~10절)’와 그 배경(1~2절)을 연결하여 오늘 본문(11~32절)을 읽으면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바리새인, 서기관들아… 너희는 원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큰 아들이 되어 버렸구나. 구원받은 은혜는 잊어버리고, 처음 나와 언약 맺을 때 그 낮은 마음은 저 뒤로 던져버리고, 그저 아버지의 재산에만 관심을 두는 큰 아들이 되었구나.”라는 아빠 하나님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본문을 ‘전도’라는 종교적 행위 혹은 ‘포용’이라는 종교 윤리적 해석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대속의 은혜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는 ‘생명’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12절에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살림’은 단순한 재물이 아닙니다. “살림”으로 번역된 ‘bios’는 ‘생명(life)’이라는 뜻입니다.

네, 형은 참 딱한 사람입니다. 동생과 함께 ‘살림(생명)’을 이미 나눠 받았습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잡은 “살진 송아지”는 자기도 먹는 것입니다. 그걸 동생 혼자 다 먹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베푸신 잔치(눅14장 15절 이하)에 참석한 온 가족과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그려진 형은 ‘자기 의로움, 욕망, 욕구대로 살지 못한 억울함’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자기 본성과 분을 이기지 못해 결국, “살진 송아지”를 뿌리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살진 송아지”는 단순히 맛난 고기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드려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살림:bios)을 이어 받은 아담(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싫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 자처하며 유대인이라는 껍데기로 살아도 형의 본질은 동생과 같은 ‘죄인’입니다.

아버지께서 베푸신 ‘살진 송아지’를 먹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형은 ‘염소 새끼’ 타령이나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본문은 ‘자아실현을 위해 종교생활 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뉴저지주님의교회에서 모두 함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진 송아지(십자가의 은혜)’를 나눠 먹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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