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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17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요한복음 13장 31~38절


1. 오늘 묵상할 본문은 좀 짧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새계명 선포와 베드로 이야기가 13장 전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13~17장은 새계명, 새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읽고 계시는 13~17장의 내용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기억력(?)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감동하심으로 그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들에 성령의 감동이 임하여 ‘그때 그 말씀’의 진짜 의미(진리와 생명)를 발견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며,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을 감동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 또한 요한복음을 읽는 저와 여러분의 어두운 마음, 자기 중심적 해석에 기울어진 마음을 비추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령의 비추심을 간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의 자세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심령의 밑바닥을 비추시는 은혜가 나를 덮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도저히 그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옛 습관 옛 자아의 모습 그대로 살수 없습니다. 자기 본성에 기울어진 모습 그대로 살 수 없습니다.

실수해서 넘어질 때가 있지만, 삶의 방향과 목적은 바뀝니다. 만약, 내 삶의 방향 그대로라면, 이런 나에게 절망하지 못한다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며 말은 하는데 그대로 산다면, 심각하게 십자가 앞에서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2. 어제도 함께 나눴듯이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보면서 ‘누가 더 나쁜가? 누구의 배신이 더 악한가?’라는 생각을 한다면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전까지의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분의 십자가 앞에 섰다면 나의 부끄러움, 나의 자존심, 내 상태의 어떠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냥, ‘십자가의 그 사랑과 은혜’로 내달리면 됩니다.

엄격히 따지면 ‘베드로’도 ‘가룟 유다’처럼 예언(?)을 들었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을 ‘가룟 유다’가 들은 것처럼, 그가 ‘닭 울기 전에 세번 부인할 것(38절)’에 대해 예수님을 통해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됐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의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우리 스스로 저울질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얼른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3. 그러나,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가룟 유다’는 우리가 아는 대로 너무 안타까운 선택을 합니다. 반대로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녹아버립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셨던 시간 동안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죽지 못해 버틴 시간, 멈춰버린 것 같은 그 시간이 지나 그의 귀에 들린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것처럼 달라졌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위해 십자가를 붙들고 버티는 것은 고행을 기반으로 한 종교 행위입니다. 그러나,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생명을 향한 은혜의 과정입니다.


4. ‘베드로’, ‘사도 요한’ 그리고 나머지 모든 제자들도 ‘배신자’였습니다. (제발 경중을 따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잘한 것이 있다면 딱 하나입니다. ‘이전 행위’에 붙들려 있지 않고, 지금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속입니다. ‘이전 행위, 이전 삶’에 묶어 둡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 자아의 어둠과 냉랭함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네, 사탄도 속일 뿐입니다. 우리를 끌고 멸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도록 계속 속삭입니다. 내 자아를 부추길 때도 있습니다. 내 자아를 억누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릅니다. 말로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탄에게 속아 범죄한 나! 연약하고 간사한 내 자아를 대신해 내가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 계명(새 언약)의 시작은 ‘사람 사이에 서로 사랑’이 아닙니다. 34절에 “서로 사랑하라”의 시작이자 끝은 ‘예수님, 그 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으십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냉랭함에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 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이 됩니다. 자기 의로움과 자기 기쁨에 기반한 좋아함을 성경 말씀하는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것과 헷갈리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나를 덮어 버리길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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