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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16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4장 25~35절


1. 오늘 본문은 참 부담스럽습니다. 26~27절 무엇보다 33절은 그냥 슬쩍 넘어가고 싶어 집니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게다가 28~31절은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본문은 기독교윤리에 있어 정말 중요한 본문이 맞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헌신적인 삶과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것을 권면하시는 말씀입니다. 33~34절의 말씀을 엄중히 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과 고백이 있다면, 나를 위한 삶에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윤리 실천을 독려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윤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원동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걸 이해못하면 26절을 보면서 종교를 위해 죽음을 택한 ‘순교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27절을 보면서 종교적 희생에 입각한 ‘사명자’가 생각납니다. 33절을 보면서 극도의 절제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산 ‘헌신자’를 그리게 됩니다. 그렇게 34~35절은 이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책망이라는 단순한 종교 논리에 의한 해석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정확한 이유를 모르면, 둘 중 하나를 합니다. 얼렁뚱땅, 적당히 회피합니다. 처음 말씀드린 것과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듭니다. 자기 목숨 혹은 전재산을 내놓은 어떤 종교적 인물의 스토리를 들으며 감성을 자극합니다. 그 순간은 마치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입니다.


2. 일반적으로 본문 26, 27, 33절은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25절의 “수많은 무리”를 향하여 참 제자가 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무리에서 제자로’ 등과 같은 설교 제목도 봤습니다.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라는 말이 제자와 관련된 이런 저런 훈련의 화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서 26, 27, 33절이 가능합니까? 이렇게 하지 못하니, 하지 말자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첫번째 자세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생각조차 없는 나 자신에 대해 탄식해야 합니다. 조금 해놓고, 일부 해놓고 의로운 척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 탄식과 고백이 깊은 심령에서 터져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런 것을 행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구나, 이것을 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으시구나. 이런 죄악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그래서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오늘,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앞에서 끊임없는 ‘자기 부인(Self-denial)’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Ego)를 향한 인간의 집착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육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 몸을 불사를 정도의 헌신도 ‘자기 가치 실현’을 위해 행할 수 있습니다. 종교심, 애국심 등으로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람이 역사 속에 많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부모의 희생도 결국은 ‘내(자기)’ 자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 자기, 자신, 스스로’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인간의 집착은 용광로처럼 타오릅니다. 그 인간 본성의 힘은 모든 것을 불태울 만큼 강력합니다.


3.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아직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 목숨(26절)”을 보면서 육신의 목숨이 생각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27절)”라는 표현이 시쳇말로 “내가 십자가 져야지, 누가 지겠냐?”라는 식으로 여겨지고, “모든 소유(33절)”를 보면서 ‘전 재산’이 떠오르고, ‘맛을 잃은 소금(34~35절)’을 보면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기독교인들의 사명과 역할’로 정도에서 이해된다면 갈 길이 너무 멉니다.

33절의 “자기의 모든 소유”에서 “소유”는 단순히 전재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존재, 실존(existence)’입니다. (사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재산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소유하려는 것도 나의 존재 가치를 물질을 통해 찾으려는 본성 때문입니다.)

또한 28~32절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Self-denial)’없는 인생의 삶은 결국 허무하게 끝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종교 업적, 윤리적 삶, 재산의 축적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유명세를 가졌어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과의 화평 없으면 망할 것이다’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28~32절입니다.

마지막 비유 ‘맛을 읽은 소금’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나, 맛을 잃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잃었다.”로 번역된 moraino는 ‘어리석게 되다. 어리석게 행하다.’입니다. 따라서 그대로 직역하면 ‘소금이 어리석게 되었다. 어리석게 행했다.’입니다.

네, 아무리 좋은 소금도 완전히 녹아서 사라지지 않으면 ‘어리석은 소금, 입에 씹혀 뱉아 낼 수밖에 없는 광물 덩어리’에 불과 합니다.

34~35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좋은 게 좋은 걸’행했다. 그런데, 십자가의 진리와는 반대였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은 삶과 반대였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결국, 너와 관련된 것들을 너를 위해 행한 것이었다. 그런 노력은 허망한 것이다. 그런 노력으로는 나와 화친할 수 없다. 그 좋은 소금이 녹아져 사라지지 않음으로 어리석은 존재가 된 것처럼, 뱉아 내버릴 광물 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네 삶이 그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나의 좋은 점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비난 받을 나의 나쁜 점은 더더욱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힘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 줄 뻔히 압니다. 내 본성 반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십자가 앞으로 갑니다. 더 가까이 갑니다. 깊은 심령에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산다.’라는 소망 가득한 음성에 이끌립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어리석은 소금 같은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완전히 녹아 든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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