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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15일 2021년 월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4장 15~24절


1. 오늘 본문은 7절에서 시작된 ‘잔치 비유’와 연결됩니다. 7~14절은 자신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진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착각하지 마라. 너희가 가장 윗자리에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14장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1절에 기록된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즉, 3절의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과 1절의 ‘바리새인 지도자’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라고 다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네, 회당장 야이로(눅 8장), 산헤드린 공회원 니고데모(요3, 7, 19장) 등과 같은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엿보는 그들’, 각자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잔치 비유’의 말씀은 잘못된 ‘유대교 종교성’에 흠뻑 젖은 사람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또 다른 ‘기독교 선민의식’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안타까운 호소입니다.


2. 지금까지 오늘 본문 (15~24절)을 보면서 ‘불신자 전도’ 및 ‘강권하여 집을 채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오해한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미 부름 받았다고 굳센 신념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르신 것입니다. 매일 붙들어야 할 십자가의 언약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더 엄격하게는 초청에 응해 놓고 뒤에 가서 딴 소리한 것입니다. 게다가 초청된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이 내세운 이유는 합당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밭을 사서 그 밭을 검사해야 하다’고 말했습니다(18절). 또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제대로 샀는지 확인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19절). 결혼을 했기 때문에 초청에 응하지 못한다’고 말한 사람은 ‘신명기 24장 5절’의 말씀이 거절을 위한 충분한 사유가 되었을 것입니다(20절).

결정적인 순간에 응했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의 이유를 가만히 보십시오. 종교적 이유, 급박한 현실의 문제 등을 가지고 합리화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비난 당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늘 그래왔듯이 이런 저런 이유와 문제를 놓고 저울질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청, 십자가로의 초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초월적 해결사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초청과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저울질한 뒤 그 결과가 자기 이익에 무게가 실리자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왜 저울질을 하다가 ‘자기 이익’으로 기울어졌을까요?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분명, ‘하나님 나라, 그 나라의 잔치’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청에 응했던 것 아닐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좋다며 ‘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에 가겠다고 말한 것 아닙니까?

처음 초청에 응했던 그들이 결국에는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초청이 십자가로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 십자가에서 자기 부인(self-denial),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해서만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천국 혼인 잔치’의 초청은 13장 22절부터 계속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혼인, 잔치, 떡’이라는 말 때문에 인간의 머리에 그려지는 이미지에 빠지면 안 됩니다. 십자가의 좁은 문을 지난 사람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꽃단장한 신부가 아니라, 굵은 눈물과 예수님의 피로 얼룩진 영적 신부가 사랑하는 신랑 예수님을 만나는 잔치입니다.


4. 이런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영적 의미를 깨닫는다면, 과연 몇 명이나 남아있을까요?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님만 사시는 것이 참 기쁨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의 문제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혀를 차는 그 문제는 결국, 십자가를 좁은 문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을 믿으며 마음이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마음이 부풀어 오른 사람은 아닙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 심령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자아의 껍질이 벗겨져 나가야 합니다. 할례를 행하는 ‘부싯돌 칼’로 내 심령을 도려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난해진 심령, 낮아질 대로 낮아진 영혼의 상태와 삶이 없는 ‘강권하여 집을 채우기 위한 외침(전도)’을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좀 과한 표현이지만, ‘짜증스런 종교 소음, 세력확장을 위한 종교 판촉’이라는 오명을 벗기 힘들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회적 공헌도는 분명 큽니다. 그런 것을 외면하거나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고, 선전하는 사회적 공헌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해,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지금 우리 발걸음과 십자가에 못 박혀 내가 죽은 삶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의 삶이 ‘소리 없는 외침, 십자가로 나아오라는 무언의 강권’이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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