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3장 10~21절
1.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흔한 경우 10~17절의 꼬부라져 표지 못하는 여인의 치유 사건과 18~21절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구별해서 봅니다.
하지만, 18절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낫게 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임재는 가장 먼저 각 사람의 심령에 회복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말씀을 천천히 살펴봅시다. 때는 ‘안식일’입니다. 장소는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 몸이 굽어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11절을 통해 ‘귀신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병이 귀신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조심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12절의 예수님의 선포는 이 여인의 전인격에 대한 놓임, 즉 자유에 대한 선언입니다. 모든 눌림, 억압에서 놓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 ‘회당장’이 등장합니다. 14절의 기록을 가만히 읽어보면 ‘회당장’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하신 치유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낫게 하신 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일을 하며 다니시는 지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뻔히 알면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오시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도 늘 그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켰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데리고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만, 정황으로 볼 때 늘 그 회당에 출석하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14절의 “분 내어”는 ‘몹시 화를 냈다’로 해석할 수 있지만, ‘매우 비통해 했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한 말을 미루어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여인은 당장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아닌데, 꼭 안식일에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하루만 더 기다리면 ‘안식일’을 범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있습니까? 제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는 그의 속마음이 14절에 기록된 그의 말에 녹아 있었을 것입니다.
2. 저는 15절의 예수님의 반응 “외식하는 자들아”라는 말을 단순히 ‘회당장’에 대한 책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의 위선적 마음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깨우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 누가복음 기록 당시에 이 말씀을 읽으며 ‘맞다. 굳이 안식일을 범할 이유가 있었나? 안식일은 죽어도 지켜야지…’라고 생각하는 모든 유대인 개종 기독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 오늘날 여전히 ‘종교행위와 형식’에 얽매여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종교화, 윤리화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안식일로 대표되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고 계십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이 맞이할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대속의 은혜를 말한 것이 율법이다. 종교행위, 종교행사, 종교의식이 아니다. 안식일은 안식이 뭔지도 모르고 미친듯이 살아가는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안식이 이루어질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라는 선포가 15~16절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17절)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자기 생각의 틀, 종교의 틀, 교육의 틀, 관점의 틀, 등등으로 이해합니다. 잘못된 복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 기도를 많이 한 사람 등이 그래서 문제입니다.
3.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입니다. 결국 10~17절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도록 행하신 기적이며, 설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8~21절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떻게 자기 생각대로 이해합니까? 어떻게 오해합니까? 혹시, 19절과 21절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이라고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이해의 방향이 어긋난 것입니다.
19절을 ‘겨자씨’에서 ‘나무’, 그것도 ‘큰 나무’로 자란 것이 끝이 아닙니다. 19절의 주동사는 “깃들였느니라”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헬라어: kataskenoo)의 진짜 뜻은 ‘거주하다’입니다. ‘둥지를 틀고, 천막을 치고 거주하다’입니다.
무엇보다 21절의 “부풀게 한”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21절을 볼 때 우리는 ‘부풀어 오른, 크기가 커진 가루 반죽’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부풀게 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zumoo’는 그냥 ‘발효된’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발효의 결과로 나타나는 ‘부풀어 오름’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게다가 술을 빚는 것으로 생각하면 양은 같습니다.
네, 19절은 양의 변화가 아니라, 성질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는 것과 같은 완전한 성질의 변화, 본질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있을 때, 그 결과는 전인격의 완전한 변화로 나타납니다. 죄인에서 의인, 죽음에서 생명, 사망에서 영생, 자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됩니다.
지금 완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시작되었음을 믿고,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한 부분씩 주님과 함께 매일 매일 변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넘어져 쓰러질 지 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붙잡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완전히 변화된 것(부풀어 오름)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루어진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에 깃들어 사시길 축원 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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