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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2월 11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13장 1~9절


1. 오늘 읽으신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회개하라. 아직, 기회가 있으니 회개하라!”입니다.

본문 1~5절에 기록된 ‘빌라도 사건,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은 예수님 당시에 잘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911테러’같은 사건이었습니다.

1절에 기록된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은 빌라도가 어떤 종교의식을 행하면서 갈릴리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 힘듭니다. (고대 로마는 나름 문명 사회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관개(灌漑, irrigation)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그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동자들을 현장에서 무참히 처형한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4절의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 역시, 빌라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는 평상시에 예루살렘을 감시하고, 전쟁시에 예루살렘을 방어하는 여러 개의 망대를 쌓았다고 합니다. 특히 유대인의 명절에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여 총독은 ‘안토니아 성채’에서 성전과 예루살렘을 직접 감시했습니다.

2. 아무튼,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을 예수님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의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두어 사람”이 뉴스를 전하듯 객관적 사실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사건’을 당한 피해자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흔한 말로 ‘무슨 죄 때문에 그들이 그런 X죽음을 당한 겁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상대적 의로움’입니다. 나는 그런 죄를 안 지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유대교 종교생활 나름 열심히 하니까 그런 일을 안 당할 것이라는 자기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닙니다. 저주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retribution)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로움의 함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붙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인 너를 위해 내가 완전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그러니, 죄의 그림자에서 두려워 말고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너라.”라는 선포입니다.

그래야 6~9절도 이해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단순한 인간의 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생명의 열매로 맺히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의미합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나 대신 사시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6~9절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핵심은 8절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입니다. 이 속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 한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한번만 더 용서해주십시오. 지금까지 그렇게 기다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많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제가 십자가로 갑니다. 제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갑니다. 한번만, 한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입니다.

3. 사실, 인간의 상대적 의로움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본질적 두려움을 자신의 상대적 의로움으로 감추려 합니다. 뭔가 남보다 나은 것을 가지고 자기를 포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회개하길 원하십니다. 한번 회개로 끝나는 삶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십자가 붙들고 자기 의로움의 함정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기 가치 증진을 위한 종교생활의 악순환을 십자가로 끊어내야 합니다.

9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기다렸다가 안 되면 다 지옥에 보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자기 의로움의 열매가 아니라,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자기가 죽은 사람은 절대 찍혀 버릴 일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죄사함의 능력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8절의 “그대로 두소서”로 번역된 헬라어 ‘aphiemi’는 ‘용서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단어가 또 사용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죄 용서를 선포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에서 ‘사하여 주옵소서’가 ‘aphiemi’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어떤 일들을 보고 이런 저런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입에 오르내리며 나도 모르는 상대적 의로움에 빠져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연약하여 자기 의로움의 함정에 빠졌더라도 다시 십자가 붙잡고 빠져나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회개합니다.

다시 십자가로 부르시는 주님의 인자하신 그 음성이 너무 아름답고 귀합니다. 내 자아, 생명, 의로움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진리로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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