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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월 7일 2020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3장 1~14절


1. 이제,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전환 됩니다. 1~2절에는 당시 역사적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성경은 종교의 경전을 넘어서, 고대근동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이런 점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 정치적 배경을 조금 말씀드립니다. 1절에 등장하는 ‘디베료 황제’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구구스투스(가이사 아구스도)’ 다음으로 집권한 황제(AD 14~37년)입니다.

로마제국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헤롯, 빌립, 루사니아’를 분봉왕으로 세웠습니다. 분봉왕(分封王, Tetrarch)은 황제가 영토를 나누어 그 영내의 백성을 다스리게 한 왕입니다. 중세시대의 ‘영주(領主)’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를 총독으로 이스라엘에 파견하여 관리, 감시, 감독했습니다.

2절의 ‘가야바’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 현직 대제사장이었고, ‘안나스’는 전임이였습니다. 두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는 전임이었던 ‘안나스’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접어두고라도 정상적 유대교 종교 전통이 무너져 있었고, 정치적 이권 등이 종교에 깊게 개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자들을 통해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빈 들”에 있었던 ‘세례 요한’을 통해 일하십니다.

단순히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악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짜 이유는 망각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드러내거나 유지하는 수단과 방편으로 ‘메시아’를 이용하고, ‘예수님’을 자기 과시의 도구로 이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권력, 인기, 힘에 걸림돌이라고 판단되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세상의 약자라고 인식되는 사람들이 선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없는 자, 약한 자는 예수님을 이용해 있는 자, 강한 자가 되려 합니다. 결국, 인간의 궁극적인 죄성은 ‘자아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작이 그렇습니다.

시작이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변화를 위해 나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3절의 “회개의 세례”는 결코 일회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례’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오르는 ‘종교 예식’에 대한 이미지를 빨리 지워야 합니다. ‘세례’는 죄가 용서받았다는 종교적 증표, 증명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종교적 예식은 더더욱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는 시작입니다. 이미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고, 그 죄악에서 돌이킬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다짐하고, 그 은혜에 이끌림 받은 사람이 ‘내적 신앙결단과 변화’에 대한 외적 표현입니다.

심판으로 내가 멸망할까 두려워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좀 과격한 표현으로 심판을 면제받으려고 받는 ‘종교 증서 혹은 부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개의 세례’는 선포입니다. “심판은 범죄한 내가 받아야 하는데, 나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 받으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살았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죽었다.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나 대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라는 선포입니다.


3. 세례 속에서 회개가 너무 약화되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두려움과 은혜가 공존하는 엄중한 영적 무게가 다 사라졌습니다. 세례 교인 숫자 늘리기에 급급해서 너무 남발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때도 ‘세례’라는 ‘종교의식’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을 통해 베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깊은 진리는 사라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혈통과 종교전통에 찌든 자기 의로움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이렇게 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느 덧 ‘내가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라졌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는 자기 의로움에 근거한 자기 과시욕을 충족시키고, 포장하는 도구로 십자가를 이용한 것만 남았습니다.

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미 그렇게 된 겁니다. 알량한 도덕, 윤리, 헌신, 봉사 등으로 덮으려 하면 안 됩니다.

종교 윤리, 헌신, 봉사에 대하여 그 당시 ‘바리세인, 서기관 등’을 따라갈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종교생활에 관하여는 바리새인, 서기관, 유대인 반만이라도 해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들 비판하세요.”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11~14절을 보면서 혹시라도 비슷하게 한 걸 가지고 ‘나는 의롭다. 나는 좀 도왔다. 나는 저러지 않는다.’고 우쭐거리면 안 됩니다. 언젠가 저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정말 ‘회개의 세례’를 받을 영적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11~14절의 말을 듣고 통곡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도저히 저렇게 할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나를 드린 사람은 자신을 통해 드러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입을 다뭅니다. 너무 놀라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진짜,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라는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이 꿈보다 더 꿈같은 일이 저와 여러분을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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