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장 41~52절
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소년기 시절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선입견(?)이 작동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신적 지식과 지혜를 나타내는 본문이다. 어릴 적부터 얼마나 똑똑하시면 성전에서 저렇게 가르치셨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임하면 나도, 내 자녀도 똑똑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잘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라는 유아적인 발상을 하게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을 읽을 때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50~51절을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마리아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에게 12살 된 예수님을 잃어버릴 뻔했던 이야기, 예수님을 찾았을 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여 들려주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이 녹아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때는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오. 너무 경황이 없어서도 그랬고, 그저 좀 황당한 말로 생각했다오.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십자가 사건 이후, 아니 예수님의 영(靈, Spirit)이신, 성령이 오신 뒤에 야 깨달았다오.”
여기서 51절에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는 ‘분명히 깨달아 기억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말’로 번역된 것은 ‘일(사건, 상황, 정황)’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았고, 이런저런 평범치 않은 일과 사건, 인물, 예언 등을 직접 경험한 ‘마리아’에게 41~49절의 상황 역시 뭔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범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상황을 조금 더 생각해봅니다. 41~42절의 상황은 정말 연례적이고, 평범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정상적인 유대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12번을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43~44절의 정황은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잘 돌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강도의 위협 혹은 짐승의 공격이 빈번했던 과거에는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같은 고향의 지인과 친족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른들은 서로 서로 작은 단위로 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늘 그랬던 것처럼 어린 예수님이 또래의 친지 혹은 친구들과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사라진 것을 발견한 요셉과 마리아는 급히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사흘 후”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너무 알레고리식의 해석이지만, ‘사흘’이라는 정확한 시간을 마리아가 기억하는 것도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3.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남았습니다. 첫째는 과연 소년 예수님은 성전에서 무엇을 듣고 묻고 계셨을까? (46~47절)입니다. 두번째는 왜 49절의 대답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입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입니까? 또 너무 당연한 대답이 떠오르십니까? 첫번째는 정확히 몰라도, 두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히 하나님의 집, 성전에 계셔야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본문의 시점에서 계신 성전은 헤롯이 지은 성전인데, 과연 하나님의 집으로써 종교적 정통성이 있는 곳인가요? (힌트를 드리면, 유월절입니다.)
네, 친히 유월절에 드려질 흠과 티가 없는 온전한 제물,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화려한 언변과 화술, 논리로 ‘종교지식’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고 ‘성전에 남아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소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선생들’과 나눈 대화, 묻고, 듣고, 답하신 것은 ‘대속의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를 묻고,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도록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질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선한 질문… “대체 우리가 유월절에 뭘 하고 있지? 대체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이지? 저 아이가 말한 ‘대속의 은혜’가 맞는 것인데, 우린 지금 뭘 믿고, 뭘 붙들고 있지?”라는 영혼의 질문을 마음에 담았을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처럼…
저와 여러분의 삶, 우리의 예배를 통해 사람들의 심령에 영적질문을 남겨주는 것 까지가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영적질문에 대한 해답은 성령님께서 친히 그들의 심령에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질문과 여운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괜한 말과 행동으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또 ‘뉴저지 주님의 교회’를 통해 작은 영적 날개 짓을 통한 큰 변화를 이루실 길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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