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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월 5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요한복음 1장 43~51절


1. 오늘 본문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기록입니다. ‘사도(使徒, apostle)’ 혹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칫 종교적 사명에 기울어질 수 있는 표현을 접어두고 담담하게 읽어보십시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과 말 그대로 인간의 만남입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과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어떤 유행가의 가사처럼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신비적 영역’도 아닙니다. 흔히 무당에게 사용하는 ‘용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도 아닙니다.

(참고로 ‘용하다’라는 표현은 한국어만 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이해가 됩니다. 굳이 다시 표현한다면 ‘신기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고, 특이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특히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만남(47~51절)을 ‘용한 무당’과의 만남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2. 또한 43절의 “나를 따르라”를 맹목적 명령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 어떠한 질문도 없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신적 권위로 찍어 누르시지 않습니다. 먼저 사랑으로 녹이십니다. 사랑 안에서 품으시고, 우리 영혼에 속삭이십니다.

사탄 마귀, 귀신의 장난처럼 불순종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순종에 대한 떡고물, 일명 ‘축복’을 미끼로 우리를 조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동행’입니다. 불러서 우리만 내보내시지 않습니다. “돌격 앞으로!”가 아닙니다. 본문 그대로 “나를 따르라!”입니다.

“따르라”로 번역된 ‘akoloutheo’는 ‘함께하다, 동행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 정확히는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3.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써먹기 위함’이 아닙니다. 끝까지 같이 함께 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죽음을 향해가는 우리를 십자가, 그 사랑 안에 품으셔서 함께 가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을 믿는다면, 십자가 아닌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방향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제자…’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로 걸어간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를 향해 걷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길 기뻐한 사람들입니다. 지쳐 쓰러지고, 넘어져도 십자가를 향한 영혼의 방향을 놓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4. 우리가 참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용어화 되어 주입되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아니, 복음서를 읽으며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라는 말입니다.

특정 훈련 혹은 단체 등을 폄하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조심 또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 중 하나가 익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전략에 너무 쉽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은혜’에 대한 ‘익숙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간의 어떠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익숙함’의 함정에 빠진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두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에 대한 순전함을 읽어버립니다. 이것 저것 곁눈질을 합니다.

47절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간사한 것이 뒤 섞인 사람이 됩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말입니다. 십자가를 붙든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삶은 자아실현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간사함”으로 번역된 ‘dolos’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 술수, 꼼수(계략)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5. 그럼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나다나엘’이 그렇게 순수했던 사람이었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간사한 것이 없음’은 흔히 말하는 ‘착한 사람, 순수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49~50절)투성이지만, 하나님의 예정(48절), 성령의 전적인 역사 안에서 ‘구원을 향한 한가지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는 ‘십자가를 향한 순전한 마음’을 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다나엘’같은 존재였습니다. 50절의 기록처럼 단순하게 자기를 알아본 ‘용한(?)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과 우리 모습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더 큰 일”,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는 일’까지 인도하셨습니다. 51절을 그저 신비한 영적 현상으로 이해하며, 뜬구름 잡듯 해석하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의 회복, 생명의 회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육신의 생명이 있다면, 익숙함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십자가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더 큰 일, 더 새로운 일, 십자가 아니면 불가능 한 그 일’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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