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장 29~42절
1.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9~43절은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두 번째 증언입니다. 35~42절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내용입니다. 그 중 한 명이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입니다. ‘베드로’는 동생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지나면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에게 집중됩니다. 그러나, 이미 ‘세례 요한’의 고백(29절)을 통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 속에 있는 단순한 ‘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범죄 타락한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2. 조금만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죽음’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운명을 고민합니다. 애써 회피하지만, 결국은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 서게 됩니다.
사실, ‘죽음’도 반대말이 없습니다. ‘생명 없음’이 죽음입니다. 활을 떠난 화살처럼,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임과 동시에 ‘죽음’입니다.
생명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음’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또는 모르고) 행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한 인간의 갖은 노력과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직면하셨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인간이 맞이할 ‘죽음’을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삼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죽음을 향해 떠나는 인간 운명의 화살을 대신 맞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생명으로 죽음을 막아 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것! 죽음을 이기는 것! 죄 사함에 대한 갈망! 생명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29절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고 고백하는 그의 감격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고 가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airo’는 ‘짊어지다, 운반하다, 들어올리다, 품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3. 저는 ‘airo’의 뜻 중에서 ‘품다’라는 뜻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생명 없음의 상태, 범죄함의 상태에 있었던 나! 이런 나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마지막인 죽음! 그러나,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나 대신 십자가에 품고(끌어안고) 죽으신 예수님!”
어설픈 전쟁영화의 자폭 장면을 예화(?)로 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가치를 영혼 깊이 묵상하는 것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스스로도 너무 많이 귀로 듣고, 입으로 내뱉아서 ‘종교 용어’라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익숙함이라는 양면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익숙함은 반드시 무뎌짐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더 사모하십시오. 말씀의 검으로 심령의 굳은 살을 도려내십시오. 육신의 눈과 손에 잡히는 것들이 십자가를 향한 영혼의 시선을 가리지 못하도록 기도하십시오.
4. ‘세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출신성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영혼 속에 생명, 죽음, 속죄에 대한 영적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31절과 33절을 보면 ‘세례 요한’ 조차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그 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실 때!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을 봤을 때! 육신의 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그것을 봤을 때! 29절의 고백이 터진 것입니다.
‘죽음’은 절대 ‘생명’을 갈망할 수 없습니다. 죄인은 죄사함에 대한 열망이 없습니다. ‘성령의 살리시는 역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으로 연결됩니다. ‘죽음’으로 끝날 ‘땅의 것, 육체의 것’에 대한 갈망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옮겨가게 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절)고 말한 ‘안드레’도 그 말에 반응한 ‘베드로’도 ‘성령의 살리시는 역사’ 안에서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고독 가운데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내 안에 ‘내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간절한가?”라고 말입니다.
대단한 영적 진리에 다다르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질문을 하신 것조차 ‘성령의 두드리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을 두드리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쫓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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