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9장 37~50절
1. 오늘 본문의 기록부터 현저히 줄어드는 기록이 있습니다. 흔히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신적 능력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 귀신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기록자인 ‘누가’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진정한 예수님의 기적인 ‘십자가 대속의 역사’를 향한 예수님의 행적을 중점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를 중심으로 기록해 나갑니다.
이를 통하여 처음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에 관심을 보이며 읽어가던 ‘데오빌로(눅1:2)’의 시선을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독자(저와 여러분)의 시선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향하도록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37~43절은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신 것인데, 그것도 제자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는 본문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도 분명 맞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여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결국에는 오직 예수만 보이게, 드러나게 하려는 저자 누가의 마음과 성령님의 마음으로 보십시오.
2. 본문 37~43절은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한심한 듯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본다면 일명 ‘축귀(귀신 쫓아냄) 사역’을 하지 못하는 목회자나 그리스도인은 바보가 됩니다. 말 그대로 믿음 없는 자가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귀신 쫓아내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 39절을 보면서 ‘귀신 들린 사람이 능력자 앞에 올 때 이런 현상을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꾸짖으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41절)”라며 예수님의 책망을 언급합니다. 그렇게 결론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귀신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행하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틀렸다.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껍데기만 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앞 뒤 상황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는 ‘베드로의 고백’ 이후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자아의 죽음, 자기 부인(Self-denial)’을 말씀하셨습니다. (18~24절) 그렇게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도 ‘십자가의 죽음(31절)’이었습니다. 그 결말은 ‘오직 예수(36절)’였습니다.
그럼, ‘제자들도 못 쫓아낸 귀신을 예수님이 쫓으신 사건’ 바로 뒤의 기록이 무엇입니까? 41절의 꾸지람(?)하시고, 귀신을 쫓으신 뒤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44절입니다. 예수님이 잡혀 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3. 그렇다면, 37~43절의 기적 속에 담긴 의미, 이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네, “제발, 나의 기적과 신적 능력에 머물지 마라. 그걸 보고 따라왔더라도 결국 십자가의 진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 육신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구나. 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고, 축복 내려주는 도구가 아닌데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입니다.
귀신의 괴롭힘을 당하고, 아픈 사람들, 이런 저런 삶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 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입니다. 목적입니다. 영적 순수성의 유무입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향한 순수한 마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죄성의 어둠에 장악 당한 내 안에 참 빛으로 임재하실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귀신 쫓는다며, 병을 낫게 한다며, 축복받게 한다며 너무 티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괜히 신비스럽게 자기를 포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참 능력이며, 빛이심을 믿는다면 그냥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그분의 임재가 있기를 간구할 뿐이어야 합니다. 그 분의 임재가 있기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에 내 자아가 죽는 것 밖에 없기에 고개는 숙여지고, 마음의 자세는 낮아지며, 목소리는 겸손해 집니다.
4. 십자가 밑에 엎드려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에게만 십자가 위에서 흐르는 보혈의 능력이 흘러 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걸 잊으면 46절 이하의 제자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됩니다. 예수님 앞에서도 그저 누가 큰지 다투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혹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참 교묘합니다. 인간의 본성인 질투를 ‘누가 하나님께 쓰임을 더 받았나? 누가 하나님의 축복(절대 사람이 원한 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을 더 받았나? 등’으로 서로 경쟁합니다. 물론, 그런 경쟁은 ‘영적 도전, 영적 모범, 간증거리’ 등의 단어로 합리화합니다.
‘이튿날(37절)’, 십자가의 진리를 놓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의 죄 때문에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또 바라봐야 합니다. 이 진리를 귀와 영혼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44절)
내 마음과 중심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내 삶과 입술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