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9장 18~27절
1.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다양한 이유로 예수님을 쫓던 그들에게도, 누가복음을 비롯한 모든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영적 전환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기존의 메시야(구원자)에 대한 생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방법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16장), 마가복음(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교차적으로 살펴보면 이 사건이 있었던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황제를 칭하는 ‘가이사’와 분봉왕 ‘빌립’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과거부터 ‘반인(半人) 반염소’의 형상을 한 ‘판(Pan)’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초대황제로 즉위하자 그곳에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신전을 지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20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의 심령을 후비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마태복음 16장 17절’의 기록처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심령과 입을 열어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말만 했다고 그를 구원받은 성도라고 부추기는 것에 이런 본문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2. 이런 대화가 오고 가기까지의 과정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진 장소가 어디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우상 앞에 절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세상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신으로, 구원자로 생각하며, 섬기던 곳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옆에서 ‘아멘’한다고 입만 벙긋하듯 ‘다 그렇게 말하니, 다 그런 거 아닙니까’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질문 속에는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냐? 너는 나를 대체 왜 따라다니는 것이냐? 나를 믿는 진짜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영적 질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질문에 대하여 ‘예수 구원, 오직 예수 등’의 구호성 대답을 조심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당연히 그러하다. 믿는 자는 절대 그럴 리 없다.’라는 식의 종교적으로 학습된 대답을 삼가야 합니다. 너무 뻔한 대답을 하는 자신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왜?’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 질문 마저도 화석화(fossilization)되어 참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3. 베드로는 이미 제자로 부름 받은 것 같았지만, 이제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분명, 완전한 것이었으나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2절을 직접 들었음에도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생각, 본성으로는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천국 입장권’을 발급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십자가의 길, 그 좁은 길, 그러나 생명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23절)
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23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고 영접했을까?”라는 다소 비신학적인(?)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반드시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는 정답이 있기 때문에 비신학적 질문이라 말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묵묵부답입니다.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글로 이런 제 심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자기 부인(self-denial)이 시작이며, 과정이며, 끝입니다. 제발,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가치를 높이려 하지 마십시오. 자아의 욕망을 종교 껍데기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갖은 종교적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자신의 의로움과 바람을 꾸며 대지 마십시오.
매일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싸워야 할 것은 외적 유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붙들고 발버둥 치는 모습, 제가 십자가 앞에 엎드린 모습을 함께 보며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의 십자가 붙든 영적 몸부림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의 시작을 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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