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7장 37~52절
1.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외침(37~38절)에 대해 사람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생명의 물이신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 헛된 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 방황하는 인간을 향한 생명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알아서 생각합니다. 생명 없는 인간을 향한 생명의 이야기로 종교라는 근사한 행위를 만들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자아를 살찌우는 그런 행위가 너무 좋았습니다.
40절 이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나, 듣는 그 자리에서 다들 알아서 생각합니다.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지자’도 사람이 붙인 종교 직분입니다.)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신이 생각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갈릴리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난리였습니다. (40~43절)
2.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46~49절은 더 가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 하신 모든 말씀을 보고하는 “아랫사람들(47절)”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아랫사람들”은 뭔가 다르다는 것(46절)을 직감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그들은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절)”며 의심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갈까 봐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의 인기가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너무 싫었을 것입니다.
더 깊숙한 내면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 자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껍데기인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의 힘! 생명의 능력! 생명의 따스함이 오히려 두려웠을 것입니다.
껍데기 권력과 힘을 동원해 당장이라도 체포해서 가두고 싶고, 죽이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예수님을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아니야, 아니야, 예수는 ‘메시야’일리 없어! 아니, 그리스도이면 안 돼!”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래 아니지! 그럴 리 없지. 율법과 구약성경에 통달한 우리 중에 아무도 그를 믿는 사람 없지. 그렇지!”라며 스스로 확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48~49절에 잘 드러납니다.
3. 하지만,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요한복음 3장)에 영혼의 충격을 받은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시고, 각 사람에게 성령으로 오시는 놀라운 생명의 일을 경험한 뒤 ‘니고데모’, 제자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달라졌습니다.
이런 내 자아가 성령의 불에 타버리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참 생명의 회복!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이 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당국자(대제자상들,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초막절’은 가장 즐겁고 풍성한 종교 행사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으로 즐기고, 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내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이 뿌리를 내릴 생수의 강이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4. 무엇보다 ‘초막절’의 영적 의미를 상징하는 가장 큰 두가지 예식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첫째, 일주일간 장막을 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뜨겁고 메마른 광야에서 몸을 쉬고, 보호하는 것이 장막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언약궤가 있는 성막(장막)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동행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매…”에서 ‘거하시매’는 ‘장막(성막, 초막)치다’를 의미하는 ‘skenoo’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계시록 21장3절’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영적 맥락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두번째, 초막절 기간 동안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습니다. 그렇게 제단에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연출(?)합니다. 이것을 통해 광야 생활할 때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성령이 임재로 모든 것을 깨달은 그들이 받을 영적 감격을 상상해보십시오. 초막절 마지막 날에 외치니 그 말씀(37~38절)! 요한계시록 22장 1~2절까지 연결되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보십시오.
모두가 성경을 보며 이상한 소리할 때, 예수님만 말하고, 십자가를 통한 참 진리를 묵상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발견하길, 생수의 강이신 예수로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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