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9장 1~17절
1. 오늘 본문은 3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1~6절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내용입니다.
7~9절은 분봉왕 헤롯(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과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짐작케 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특히, 분봉왕 헤롯이 왜 예수님을 만나려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0~17절은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보내십니다. 그냥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6절의 기록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선포,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제자들에게는 당부하신 3~5절의 말씀은 좀 가혹할 정도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대하면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제자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솔직히는 이런 삶을 불가능합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도 ‘한 벌 옷’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절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금욕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1절의 ‘주시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didomi’는 ‘주다’라는 의미와 함께 ‘허락되다, 허용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신 것이 전적인 내 소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용할 수 있도록 권한이 허락된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위임된 것입니다. 위임된 것은 절대 맘대로 쓸 수 없습니다.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참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셨다’라는 이유로 너무 맘대로 사용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서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그 능력과 권위가 자기 것인 양 사용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너스레는 떱니다.
그토록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고, 전부 하나님 것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래야 신앙 있어 보이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을 포장할 수 있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일정부분 드리고 나면(물론, 그것 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냥 맘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이처럼 오늘 본문은 이야기를 따로 보아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 누가복음 전체, 성경 전체의 내용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내일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사도(제자)들이 돌아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말합니다. 여기에 모인 ‘무리들’ 속에는 제자들을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6절의 사건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해서 따라온 사람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만약, 없었다면 제자들이 정말 잘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읽고 있는 독자의 영혼의 시선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손 대어 낫게 한 기적을 경험했건, 제자들이 위임 받은 능력을 통해 기적을 경험했건 거기서 멈추지 말고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7~8절 역시 그런 맥락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갖은 생각, 심지어 죽이고 싶은 부정적인 생각을 한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잔치’에 나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기 위해 베푸신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최초의 성만찬입니다. 특별히 선택된(?), 종교지도자계급(?)의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처음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이 자리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처음 선포하신 것입니다.
3. 저는 13절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읽고 있는 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물론, 제가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저도 그 떡을 먹고 살았을 뿐입니다. 지금도 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없으면 안 됩니다.
그저, 이런 저의 삶의 태도와 인생의 발걸음이 통로가 되어 제 주변의 사람들이 ‘벳세다의 예수님’을 향하도록 할 뿐입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증인 된 삶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능력과 축복을 절제함 없이 자랑하고, 선전하 듯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는 삶, 증인 된 삶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간지럽혀 인간 욕망에 근거한 영적 질투심 자극(’나도 축복 받아야지, 나도 천국티켓 받아 둬야지..’라는 식의 태도)이 아닙니다.
‘우와~’하는 일을 통해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런 데도 예수가 그렇게 좋은가?’라는 영적 질문을 붙잡고 나오는 사람이 더 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붙든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그 사람’이 ‘벳세다의 예수님이 베푸신 생명의 떡’을 맛보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