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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월 25일 2021년 월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8장 40~56절


1.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능력, 그 기적의 위대함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기적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살아난 감격과 실존적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치병인 혈루병이 나은 것,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선포가 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48절과 50절을 보면 예수님의 관심은 ‘혈루병 치유,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소개된 이런 종류의 기적은 영혼 구원을 위한 과정, 관심을 끌기 위한 도입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사를 완성하실 온전한 어린양 되심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린 야이로, 두려움에 떨며 옷자락 밖에 만질 수 없었던 여인의 인격을 보호하셨습니다. 조금의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를 살린 기적을 떠벌리지 않으셨습니다. ‘복음 사역에 효과적이다. 간증거리이다.’ 라는 식으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오히려 조용히 덮어놓으셨습니다.

2. 야이로의 두려움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12살된 외동딸이 갑자기 아팠을까요? 아닙니다. 하루 이틀 된 병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아팠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야이로는 혈루병 여인처럼 여기저기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의료지식과 기술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치유의 사건을 보며, 여호와 하나님의 치유를 기대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41절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야이로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신앙에 회의가 들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시간에 대한 허망함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41절의 태도는 ‘믿음’이라 기 보다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것일지 모릅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그동안 유대교 회당의 회당장이라는 자신의 직분, 신분까지 내려놓을 각오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이 바뀝니다. ‘야이로’와 ‘그의 딸’에서 ‘혈루증 여인’에게로 옮겨갑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급히 가야 하는데,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 것입니다.

사실, 이 두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음으로 많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사건이 한 장소, 한 시간에 공존함으로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방향이 달라지게 됩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혈루증 여인’의 치유를 직접 목격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커집니다. “진짜, 이분은 다르다.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난 지금 딸의 병 나음을 구하며 예수님을 내 집으로 초청했지만, 이분은 ‘구원’을 말씀하신다. 이게 뭘까? 정말 이게 뭘까?”라는 질문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적 방향성이 교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52절에 ‘죽음’에 대해 ‘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음이 아니라, 거룩한 영적 질문과 충격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누가’가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을 가장 상세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제자들(베드로, 요한, 야고보)’외에 ‘야이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혈루증 여인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야이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회당장도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을 초청했는데, 나도 할 수 있다. 그래, 돌에 맞는 것 따위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회당장이 저러는 걸 보면 저 분은 다르다. 뭔가 다르다.”라는 영적 질문과 용기가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모습은 이래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린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영적 동기부여가 생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간증, 나눔이라는 말로 이런 저런 것들을 서로서로 말합니다. 사실, 그 대부분은 ‘땅의 축복’의 많고 적음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고난을 거쳤다고 말합니다. 헌신, 봉사, 서약, 뭔가 드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인간 내면의 영적 질투를 자극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도전 받았습니다.’라는 이상한 종교 용어로 자기 질투심을 포장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것은 엎드린 자세입니다. 그저 옷자락에 손을 대는 낮은 마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서로를 바라볼 때, 예수님 앞에 엎드린 모습이 보이길 기도합니다. (꼭, 꼭, 꼭!!!) 그렇게 더 많은 야이로, 혈루병 여인들 우리 교회를 통해 예수님 만나길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의 낮은 마음과 삶의 태도에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가득 채워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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