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8장 1~15절
1.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3절은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던 여인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4~15절은 밭에 뿌린 씨의 비유입니다.
이 두 내용 역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익숙합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또 단편적인 이해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여자들에 관한 내용은 ‘초자연적 기적을 체험한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무시와 멸시를 받던 여인들이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경험한 뒤, 예수님과 제자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그리고,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겼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렇게 ‘바로 그것’, 우리가 흔히 떠오르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주의 종과 교회를 위해 섬기라고 말하기 딱 좋습니다.
네가지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는 어떻습니까?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좋은 땅이 되라, 좋은 땅이 되어 ‘백배의 결실’을 하라고 말합니다. 결실에 대하여는 ‘보이는 축복, 보이지 않는 축복’ 모두를 말하며, 훌륭한 신앙인, 축복 받아 쓰임 받는 신앙인이 되라고 말합니다.
항상 말씀드리듯이 이런 것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로, 지금 가진 것으로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교회를 섬기는 등의 일들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심어 결실을 많이 하는 좋은 땅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깊은 영적 샘물에 우리의 마른 목을 축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오염된 우리 영혼을 씻어야 합니다.
2. 여인들의 이야기의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3절의 “자기 소유”는 물질, 재산, 소유 등만으로 예수님을 섬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로 번역된 헬라어 ‘huparcho’는 ‘준비된 것, 손에 있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원어와 성경 전체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며,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자기들의 소유’ 속에는 시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고 적음을 떠나 ‘이미’ 내게 있는 것으로 섬긴 것, ‘지금’ 내 손에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있는 모습 그대로, 있는 것 그대로’ 예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고 적음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심, 마음의 어떠함을 보십니다. 순수한 마음, 겸허한 마음,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있는 모습 그대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대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의 진정한 가치를 짓밟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토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종교 헌신, 봉사, 섬김 따위로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것 같아도, 아무리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같아도 근본 죄인임을 잊지 않고, 오직 십자가 은혜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엎드리는 것이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3. 이런 마음으로 4절 이하의 ‘네가지 땅에 뿌린 씨’를 읽어보십시오. 혹시, ‘백배의 결실’을 위해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내 속에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골라내야겠다. 사탄이 내 속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더 기도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네, 그 마음도 맞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심령이 좋은 밭이 되도록 성령의 인도함 따라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좋은’은 사람의 생각과 관념 속에 있는 의미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physical)의 ‘좋은’에서 도덕(moral)의 ‘좋은’으로 넘어갔다면, 영적(spiritual)인 ‘좋은’을 향해가야 합니다.
헬라어 ‘kalos’는 분명 ‘good, beautiful, noble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좋은’, 특히 예수님께서 ‘좋은’을 말씀하실 때는 이런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좋은’은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충족시키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좋은(kalos), good, beautiful’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은’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세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가 오늘 말씀의 ‘좋은 땅’입니다. 두번째는 ‘요한복음 2장 10절’의 ‘좋은 포도주’입니다. 세번째는 ‘요한복음 10장 11절’의 ‘좋은 목자’입니다. (사실, 이 세가지를 지금 다 다루는 것은 무리입니다.)
요한복음 2장, ‘가나혼인잔치’의 ‘좋은 포도주’는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 언약’을 의미합니다. 뒤에 나온 포도주가 앞에 나온 포도주 보다 더 좋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 언약’이 유대인들이 붙들었던 ‘구약의 언약’보다 더 좋고, 완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좋은 땅, 좋은 목자’는 당연히 예수님을 말씀한다는 것은 상세히 설명 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기 전에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예수님의 심령에 심겨야 합니다. “주님, 보이는 것에 기울어지고, 자기 합리화에 익숙한 저의 죄성의 눈으로 말씀을 대하지 않게 하옵소서. 제 심령을 먼저 ‘좋은 땅’이신 예수님에게 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심정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게 하옵소서. 누구에게 말하려고, 드러내려고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제 심령을 비추게 하옵소서.”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 진정한 ‘좋은 것,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 위에 주님의 선하신 손길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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