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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월 21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7장 36~50절


1. 이 본문은 조금의 감성이 필요합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화가, 영화감독이라도 된 듯 마음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내가 그 여인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누구일까?’라는 논쟁은 접어 둘 수 있습니다. 죄의 심각성, 종류, 횟수 등을 따지는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상대적 의로움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인이 깨뜨린 옥합, 향유의 값이 얼마냐’를 계산하며 여인의 헌신, 섬김, 드림 등의 가치와 크기를 선전하며 ‘각자가 생각하는 축복’을 받기 위한 종교적 촉매제로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가만히, 이 여인 안에 있는 ‘갈등, 고민, 번뇌, 두려움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어지럽고, 괴롭고, 복잡한 심정을 누르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린 여인, 그 여인이 붙든 소망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본문의 상황은 여인의 목숨이 달린 상황입니다. 쏟아지는 비난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돌에 맞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정죄하기 좋아하는 군중의 알량한 의로움에 마녀사냥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미끼로 이용하기 위해 바리새인이 자신의 죄를 조목조목 나열하며, 비아냥대고, 수군거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네, 깨뜨린 옥합, 쏟아 부은 향유의 가치에 함몰되면 ‘여인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비싼 것을 가져와 헌신한 것을 넘어 ‘육신의 목숨’과 ‘영혼의 목숨’ 모두를 걸고 나온 것입니다.

2. 이 여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비싼 향유, 옥합을 드릴까 말까? 이건 내 전 재산인데…’라는 저울질의 마음이 아닙니다. 정죄하기 익숙한 바리새인의 시선, 그들의 정죄와 선동에 쉽게 동요하고, 수군거리는 군중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 들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봅니다. 상대적 의로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제 마음을 하나님은 분명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는데,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잊지 않기 위해 내 영혼의 시선이 십자가만 바라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눈과 귀’가 내 영혼을 향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데, ‘내 의로움이 튀어나올 때, 그런 마음이 들 때’ 엎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습니다.

교회에는 ‘이 여인의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진짜 성령의 부르심 따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 여인입니다.’라는 고백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난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은 십자가 은혜의 진리, 가치, 능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냥 종교 도덕 배우고, 자랑하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 ‘기독교’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마음의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마음이 올라왔을 때 소스라치며, 부끄런 마음, 두려운 마음 가지고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강조하는 물음이 아니라, 진짜 질문입니다. 우리 어찌 그럴 수 있는지…)

3. 사람의 상대적 의로움에서 출발한 판단, 비난, 비방, 비아냥은 ‘영혼의 목숨’을 죽이는 칼날입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기에 ‘귀에 들리는 문장, 단어, 억양’ 또 ‘눈에 보이는 눈빛, 몸짓, 태도 등’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상대방의 ‘영혼의 목숨’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보고, 듣고 계셨습니다. 39절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을 경멸하며, 그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그들의 심령 상태, 죄성에 기울어 자신이 병든 영혼임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고, 듣고 계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런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분명, 그때 나는 ‘죄를 지은 한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렸었는데… 결국 지금은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구나…”라는 찔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저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엎드려 고민, 갈등, 저를 다시 그 분의 선함 가운데 품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또 39절 때문입니다. 기록자 누가는 자신의 직업(역사학자, 의사)적 특성에 맞게, 증언과 답사,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했습니다. 당연히 성령의 감동과 함께…

그렇다면, 39절의 증언을 누구에게 들었겠습니까? 네, ‘한 바리새인’입니다. “누가 선생, 잘 들어보시오. 저 분, 저분이 바로 그때 ‘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옥합을 깨드리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던 그 분입니다. 사실, 난 그때 마음 속으로 ‘저 분’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시험하려했습니다.”라며 39절에 자신이 마음에 품었었던 생각을 들려줬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바리새인’의 마지막 증언은 “그날, 그 사건,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성과 자기 의로움에 찌는 내 영혼의 충격이었습니다. 시몬(베드로)를 향해 하셨던 말씀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야 알았습니다.”

누가에게 증언을 하던 그날 밤, ‘한 여인’, ‘한 바리새인’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회복된 영혼으로 감격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십자가 앞에 함께 엎드린 것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엎드려야 내 마음에 씌어 놓은 자기 의로움의 왕관이 흘러내립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를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나를 너의 죄를 위해 죽을 대속의 제물, 어린양으로 믿는 너의 믿음…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거라.”입니다.

이 선포는 자기 의로움으로 늘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바빴던,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던 ‘한 바리새인’의 영혼에도 울려 펴졌을 것입니다.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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