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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월 20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7장 18~35절


1. 편지를 통한 기록자 누가의 시선은 ‘세례 요한’에게로 옮겨갑니다. 단절이 아닙니다. 18절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말합니다. “그”는 ‘세례 요한(누가복음 1장, 3장)’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진정한 ‘메시야(그리스도,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억울하게 투옥(눅3:18~20)된 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했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드디어, 어제 읽으신 ‘두 사건’이 정점이었을 것입니다. 놀람과 흥분으로 가득 찬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을 찾아가 “이 모든 일”을 들려줍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은 다시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19절의 질문을 합니다. ‘그이’는 바로, ‘메시야’를 말합니다.

이 짧은 물음을 통해 두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은 성경이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군사적 리더’가 아니라,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간절함입니다. 감옥에서 늘 생각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요단강에서 만난 ‘그 분’, 자신이 세례를 베풀었던 ‘그 분’이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실 메시야’이심을 간절히 바라고 바랬을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물음(20절)을 가지고 다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22절의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히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기적의 상황, 치유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61장에 기록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례 요한은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 깨달았습니다.

특히 23절의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의 의미는 34절과 연결됩니다. ‘실족하는 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종교적 고정관념, 자기 중심적 상황 해석 등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치유와 기적이 가리키는 바 진리(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저 기적과 치유, 초자연적 능력 자체에 마음이 빼앗겨 예수님을 자기 이익, 욕심, 원함 등을 이루어 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족하는 자’입니다.

24~28절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평가(?)하시는 내용입니다. 27절은 구약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께서 예비한 진정한 선지자였음을 증명하십니다.


3. 29~30절은 일종의 나레이션(narration)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이해한 ‘백성, 세리들’과 전혀 못 알아 들은 ‘바리새인, 율법교사들’을 대비하는 나레이션입니다.

여기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진정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로움인 대속의 은혜, 그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이키는 것,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의 치명적 죄성과 약점을 인정하며 죽을 것처럼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놓치면 진짜 죽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잃어버린 교회와 개인, 회개한다면서 그냥 그대로 사는 기독종교인들… 멀리 있을까요?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여전히 익숙한 그 삶의 태도와 방향을 유지한다면 제가 종교인입니다. 지금 그대로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뭔가 잘 하는 것 같다면, 저는 자기 의로움에 취한 사람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를 대며 나 자신에게 관대하다면 저는 간사함에 속은 종교 직업인입니다. (이 한 단락을 쓰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32절에 아무 반응 없는 ‘장터의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교인들입니다. 메시야를 자기 생각대로 착각한 사람들입니다. 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내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아실현을 위한 지침서 수준으로 이해할 바엔 모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그 끝에는 죄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만 찾고,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닮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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