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7장 1~17절
1.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사건을 단편적으로 읽으면 순종함으로 하인의 병을 낫게 한 백부장의 순종,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예수님의 엄청난 능력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의 관심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힘입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자기 편향적 사고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누구도 이런 인간의 한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들려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삶이 기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1~10장에 기록된 로마군의 장교인 백부장(Centurion)의 하인을 고쳐준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동성애를 허용하셨다는 허무맹랑한 주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2절의 “사랑하는 종”, 7절의 “하인”을 꼬투리 잡습니다.
특히,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이스(pais)’는 단어를 ‘남자 소년’으로 번역한 뒤 다음과 같은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 하인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남자 소년’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단순한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동성애자였고, 그 하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면 예수님께서 동성애를 인정하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2절의 “사랑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entimos’는 흔히 생각하는 ‘사랑하는’이 아니라, ‘가치 있는, 소중한’의 의미인데도 말입니다.
이건 그냥 억지입니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하고 싶은 자기 생각을 늘어놓기 위해 성경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보십시오! 신학자, 목회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성경 말씀으로 이런 짓을 저지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원함을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 말씀조차 이렇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서 ‘신앙 좋다. 믿음 좋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순종과 믿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일명, ‘의심이 많은 사람, 신앙심이 깊지 못한 사람’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의 문제, 나의 고민, 나의 질병 등을 두고 예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선한 인도함을 구하며 순종과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부정적이고, 믿음 없고, 불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정말 제대로 성경을 읽는다면 이 말씀 속에서 ‘내가 원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는 ‘누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소위 ‘기적’으로 이야기되는 다양한 사건들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런 저런 문제, 각종 질병, 각종 귀신 등등’을 고치신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다양하게 나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그대로 된다는 예시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하지만, 그 속에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초자연적 기적은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 속에 담긴 의미,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뜻, 저자를 감동하신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친 사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너뜨리신 사건입니다.
두 가지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닙니다. 기적 자체에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너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능력이 출중한(?) 선지자, 선생 등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깨달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9절을 좀 다르게 표현하면 ‘너희 보다 백배 낫다.’입니다. “그저 나를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선지자 혹은 능력자 수준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너희보다 백부장이 더 낫다. 적어도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합니다’라는 말이라도 하는 백부장이 너희 보다 낫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 읽어 보시면, 다른 치유 사건과 달리 ‘백부장’과 ‘그 하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신앙 생활을 하는 진짜 목적이 무엇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나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까?
거기에 ‘아멘’이라고, 답했다면… 그런 목적(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목적을 아실 것입니다.)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을 내 맘대로 살기 위한 능력과 축복을 주는 종교화 된 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을 가지고 엎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ai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