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6장 1~11절
1.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안식일’ 관련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유대교 핵심 지도층(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등)과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11절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관찰하던 그들이 결정을 한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적인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를 논의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엔 ‘유대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닌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기는 어렵지만, 혹시하는 마음에 예수님을 쫓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크게 두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의 모습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메시야관(신학)에 맞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가르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것은 두번째 이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은 유대교의 기본이면서 근간이 되는 종교 규례입니다. 그리고 정기적 모임 중에 가장 중요함과 동시에 가장 자주 모이는 것입니다. 게다가 안식일과 관련된 규례을 정하고, 해석하고, 구약성경 등을 가르치는 모든 것은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유대교 종교 종사자)들’에게 생명 같은 일이었습니다. 유대교 관련 종교인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과 목회자의 관계 같은 것입니다.)
2.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본심을 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기 힘들어도, 내 생각과 반대되는 것 같아도, 극단적으로는 ‘내 밥그릇 건드리는 것 같아도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실까?’라는 고민을 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사무엘상 21장)’을 말씀하신 이유와 태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 성경 많이 읽으니, 잘 알겠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기억하지? 그때 제사장만이 먹는 진설병 먹었던 것도 기억하지? 그럼 너희가 그토록 위대하다고 하는 다윗도 율법을 어긴 거네? 너희들이 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좀 먹은 거 가지고 뭐라고 하면, 다윗도 비난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식의 태도가 아닙니다.
5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니, 내가 이제부터 새로운 종교적 규례를 세운다. 나는 나다!”라는 식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안식일을 종교화, 규례와, 예식화하여 오히려 사람들을 종교성의 굴레에 집어넣은 그들, 스스로 그런 굴레에 갇힌 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제자들이 밀을 먹는 것’을 보고 비난한 그들에게 다윗의 진설병 사건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진설병(The bead of the Presence, The hallowed bread)’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떡(영원한, 진정한 만나)’이신 예수님을 통한 진정한 안식, 영원한 안식, 진정한 배부름, 영원한 배부름을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3. 안타깝게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을 오해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오해가 아니라, 딱 자기 방식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 주장의 정당화, 자기 방어,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익숙했습니다. 좀 과격한 표현을 성경을 ‘갖다 대는 데’만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다윗의 진설병, 그것을 좀 생각해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손에 마비 증상이 있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하신 말씀의 참뜻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다. 살리는 날이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안식을 잃어버린 너희에게 영원한 안식을 줄 것이다. 나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안식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라는 예수님의 깊은 영적 부르심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 부르심은 자기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범함’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이 행하신 ‘생명의 일’이 그저 고발할 증거로만 보였습니다. (7절) 그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어떻게 할 궁리만 했습니다. (11절)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공격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던지는 안타까운 영적 질문으로 받아들였다면…’이라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종교화, 윤리화, 무속화 하여 이해하는 것을 정말 안타까워하십니다. 11절의 “노기”로 번역된 헬라어 ‘anoias’는 ‘분노한 마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판단력 부족, 어리석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 즉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가장 어리석은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는 왜 말씀을 읽는가? 나는 왜 기도하는가? 나는 왜 예배를 드리는 가? 나는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가?”라는 막연한 것 같은 영적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 입니다.
비록, 정답을 줄줄 말할 수 없어도, 이런 영적 태도가 저와 여러분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이 영적 질문들을 통해 ‘좌우에 날 선 검인 말씀’으로 남을 정죄하지 않고, 그 검 위에 나를 올려야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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