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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월 14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누가복음 5장 27~39절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리 출신 제자인 ‘레위(마태)’를 부르시고, 그가 베푼 잔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태복음(9장)과 마가복음(2장)에도 기록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유대교 율법과 관련된 종교적 관념만을 깨뜨린 사건이 아닙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았던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서도 함께 건드린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만약, 제가 세리인 마태를 불렀다면 흔히 말하는 지혜를 발휘할 것 같습니다. 마태가 세관에 있을 때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그의 집에 은밀히 찾아가서 ‘이렇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저렇게 한 뒤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가 세관에 있을 때, 세금을 걷느라 정신이 없을 때, 독기어린 눈으로 세금을 헤아리고 있을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2.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연히 죄인, 미천한 자, 가장 손가락질 받는 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를 부르신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위(마태)가 베푼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참석하신 깊은 영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제부터 죄와 비난은 내가 대신 받겠다’는 선포입니다.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셨다는 것은 죄인들을 향한 비난과 저주의 화살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몰래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셨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거 분명히 레위가 먼저 접근했을 거야. 제 버릇 뭐 주겠냐? 간사하게 예수에게 뭔가를 제시하고 그럴 듯하게 쫓아다니면서 제자랍시고 다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딱, 그 수준, 죄성을 가진 사람 수준에서 마태와 예수님의 만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개적, 공식적 초대를 통해 그를 향한 사람들의 모든 비난, 저주, 공격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십니다. 30절부터 시작되는 비난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마태’를 책임지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다면, 십자가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했다면, 사탄이 주는 죄책감의 늪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뻔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용서 받은 사람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반응한 마태의 첫걸음은 ‘잔치’였습니다. 이 ‘잔치(헬라어, doche)’는 우리가 생각하는 떠들썩한 잔치가 아닙니다. ‘식사 대접’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감격, 죄사함에 대한 감사, 이런 나를 부르신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주변의 다른 죄인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식사의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 때, 마태가 할 수 있었던 첫 걸음, 첫 시작이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 감사, 감격, 은혜를 나눈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은 ‘바리새인, 서기관, 비방하는 자들’입니다. 의사가 필요해 의사를 찾은 환자가 정상입니다. 환자이면서 의사를 찾지 않는 자들이 비정상입니다. 죄인인 줄 알고 회개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죄인이면서 회개치 않는 자들이 비정상입니다. 생명의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종교성과 자기 의로움에 얽매여 금식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잔치를 누리는 자들이 은혜입은 자들입니다. (31~36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사랑하십니다. 36~39절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쉽게 알아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완성하는 대속의 은혜를 붙들어라. 그 낡은 구약의 율법, 아니 너희가 그토록 오해한 율법 속에는 내가 십자가에서 완성할 대속의 은혜가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9절에서 ‘묵은 것이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가 얽매일 것은 없습니다. 지나간 것들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십자가의 은혜가 있고, 지금 내게 예배드릴 교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주신 생명으로 한 걸음을 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어떤 상황에도 이 말씀을 붙들길 축원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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