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5장 12~26절
1.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기록입니다. 성경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는 기적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초자연적 능력의 발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기적 등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십자가 은혜와 능력에 대한 예표입니다.
치유와 기적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사람 육체의 현상, 이 땅의 삶에 채워지는 열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에 마음이 쏠려서는 안 됩니다.
의학의 발전은 고사하고 의학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나병과 중풍은 불치병이었습니다. 게다가 병에 대한 인식은 무속 혹은 미신과 연결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의 경우는 더욱 그랬습니다. 레위기 13장에 근거하여 나병환자를 깨끗하지 못한 대상, 격리하고, 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의학, 감염학, 위생학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좋은 것입니다. 위생의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에 이런 격리와 정결을 위한 조치는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나병환자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 무속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경멸, 판단, 저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졌겠습니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최악이었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셨습니다. 아니, 품에 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자세입니다. “주여 원하시면…”입니다. 이것은 절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해주시 건 말 건, 알아서 하십시오.”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치유와 구원에 대한 주권이 오직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이 신뢰입니다.
이런 질문도 필요합니다. “이 나병환자의 마음 속에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말해야 예수님이 더 잘 들어주시겠지’ 라는 식의 얄팍한 생각이 섞여 있었을까?”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 때문에 결과를 알지만, 그 때 나병환자는 결과를 전혀 몰랐습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의 낫고 낫지 않고’가 아닙니다. 나병환자의 간절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그 사람을 예배의 자리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리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라는 것은 단순한 ‘정결규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예배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런저런 기적 같은 일, 축복이라 말할 수 있는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예배 드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통한 축복과 기적이 아닙니다.
그 축복과 기적으로 말미암은 결과물이 나를 더 세상과 가깝게 하고, 나의 자아를 기쁘게 하는 것에 빠져들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단순한 종교적 예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힘을 위한 예배, 그 예배에 합당한 삶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중풍병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들의 헌신과 노력도 정말 중요합니다. 전도에 딱 맞는 적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풍의 원인이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였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에게 ‘깨끗함을 입으라.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그 병의 원인을 규정하고 정죄하려는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서 자유함을 입었다’는 선포가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의 나쁜 버릇 중의 하나가 남의 아픔과 불행에 대해 자기 시각, 해석, 관점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그들에게 닥친 일에 대해 판단하려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아픔과 병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에게 ‘깨끗함,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인간의 정죄와 판단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22~24절 속에 담긴 예수님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육체에 나타난 ‘중풍병’에 관심이 있지만, 나는 그의 영혼에 관심이 있다. 지금 나아도 결국은 죽음을 맞는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영원히 회복되는 영혼에 관심이 있다.”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22절의 말을 듣는 순간 영혼에 지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포이후 ‘중풍병자’를 병자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병명 따위는 안 중에도 없으십니다. (나병 환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 그가 걷는 것뿐입니다. 지나간 병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저를 비롯해 교회에는 참 다양한 병, 과거, 사연, 이야기 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난 것에 대해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것 때문에 십자가 붙잡고 엎드려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있다면, 낫고자 한다면 우리를 품으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시고 가려서 도려내십니다.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선포로 침상을 들고 걸어간 그 때 그 사람처럼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한 걸음을 내딛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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